Friday, December 01, 2006

함석헌 선생의 역사 분류에 관하여

다음은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에서 발췌한 중세시대 유럽, 중국, 한국에서의 민중봉기에 관한 요약입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에 의하면 민중에 의한 반란은 근현대, 중세를 막론하고 인간의 역사상 계속 존재하여 왔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민중반란이라는 것이 근본적 속성상 힘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 의한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막론하고 그 반란(혁명)이 성공할 때보다는 실패하거나 금시 과거의 형태를 돌아가버린 듯한 형태를 띈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또한 현대라고 하여 많이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민중들이 중세나 근대의 민중들과 비교하여 다른 바가 있다면 "선거권"을 갖고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합니다. 다시말해, 투표를 통하여 권력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그들의 통치방식을 평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현대 이전의 민중들이 갖고있던 힘에 비해 확실히 차별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아래에 간단히 열거되어 있는 예를 통해서도 나타나듯이 중세, 근대의 민중이 사회와 역사 전반에 걸쳐 이룩해온 영향력을 간과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실패 여부를 떠나서 다수의 민중이 목숨을 담보로 일으킨 민중봉기의 사례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들이 속한 사회와 나아가 역사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인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아직도 2차 대전 이전까지의 수천년의 역사를 소수 영웅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시대이고, 그 이후 현재까지만의 민중(씨알)의 시대라고 정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만일 꼭 제시된 세가지 시대로 나누는 것이 옳다면, 2차대전을 전후로 나누는 것보다는 투표권의 형성 전후로 나누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봅니다.


#첨부

유럽의 농민반란

14세기 이후 집중적이고 대규모로 발생해 플랑드르,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14세기 이후, 독일에서는 15세기 초반 이후, 러시아에서는 17세기 이후에 많은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발생시기와 양상, 직접적 계기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봉건지대와 농노제를 축으로 한다. 저항에 대항하기 위해 영주층이 실시한 부역제 강화 등의 봉건반동정책이 반란을 촉발하기도 했다. 영주권의 문제를 넘어서 국가의 과중한 조세징수에 대항하여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1358년 자크리(Jacquerie)의 반란,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17~18세기 절대왕정 아래서도 이런 봉기가 여러 차례 발생했다. 사회분화가 진전됨에 따라 흉년·물가앙등을 계기로 빈농, 도시빈민들의 폭동이 영주·지주·부호·곡물상인에 대한 공격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농민반란은 진행과정에서 폭동과 학살을 수반하기도 했으며,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이었다. 무장도 곤봉이 주가 될 정도로 열악했다. 이들은 국왕과 영주의 군대에 의해 모두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농민반란은 유럽 봉건제의 질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농민반란을 계기로 영주제의 재편성, 국왕권의 강화가 나타났으며, 노동지대의 화폐지대로의 이행, 구래의 예속적인 농노제에서 영주와 농민간의 봉건적 계약관계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중국의 농민반란중국에서는 진(秦) 왕조 성립 이후 청말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농민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중국의 농민반란은 실제로는 농민을 필두로 수공업자, 염업노동자, 운송노동자, 유민 등 각 계층이 참여한 민중항쟁이었다. 대체로 사회체제의 모순에 의해 부의 편중현상이 심해지고, 토지를 잃은 농민이 증가하며, 전제왕조의 수탈과 국가체제의 문란이 심화되었을 때, 이의 시정, 토지의 균분, 귀천의 철폐 등을 외치며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때로 황건(黃巾)의 난, 백련교도의 난과 같이 종교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하고, 반원(反元), 멸만흥한(滅滿興漢) 등 이민족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운동과 결합하기도 하나 그 근본은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항쟁이었다. 중국의 농민반란은 한 왕조의 말기에는 반드시 거대한 농민반란이 발생한다고 할 정도로 규모와 연속성에서 세계사에서 특출한 위치를 차지한다.이런 것들로는 진의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BC 209~208), 왕망(王莽) 정권 하의 녹림(綠林)·적미(赤眉)의 난(17~27), 한말 황건의 난(184~205), 당의 황소(黃巢)의 난(875~884), 송의 왕소파(王小波)·이순(李順)의 난(993~995), 원의 홍건의 난(1351~67), 명의 등무칠(鄧茂七)의 난, 유육(劉六)·유칠(劉七)의 난(1510~12), 이자성(李自成)·장헌충(張獻忠)의 난(1627~46), 청의 백련교의 난(1796~1805), 그리고 근대적 농민전쟁으로도 분류하는 청말 태평천국의 난(1850~64) 등이 있다. 농민반란의 구호는 실현되지 않고 농민반란의 지도자가 수립한 정권은 다시 전제왕권으로 돌아갔지만, 농민반란은 기존 사회체제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례로 황소의 난은 장원제를 기반으로 하는 당의 귀족세력을 몰락시키고 지주제에 기초한 사대부 계층의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농민반란사료에 기록된 최초의 대규모 농민반란은 9세기말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농민반란이다. 이것은 신라의 지배체제를 마비시키고 후삼국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2번째는 고려 중엽인 12~13세기이다. 대토지겸병의 발달과 이자겸의 난부터 무신난으로 이어지는 중앙정계의 혼란에 따른 국가기구의 부패에 따라 전국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다.반란은 문신정권의 부활을 기도한 조위총(趙位寵)과 결합하기도 했으나 보통 차별대우를 받던 서북면 지역주민이나, 천민촌락인 향·소·부곡, 그리고 노비가 주동이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고립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 후기에는 반란군간의 연대가 일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중앙에 최씨정권이 들어서고 이어 원의 침략과 지배가 시작되면서 원과 고려정부의 군대에 의해 농민반란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향·소·부곡의 철폐, 노비제의 개선, 군현제와 외관제 정비 등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초래하여 중세사회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로 작용했다.조선 전기에는 조사의(趙思義)의 난,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결합한 함경도 농민들의 봉기,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유명하나 이전과 같은 전국적인 위기상황은 없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지주제의 발전과 부세제도의 문란에 따른 소농민의 몰락이 가속되어 갖가지 분쟁은 계속 발발했으며, 이들과 봉건정부 지주층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이것은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 1862년의 전국적인 민란,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다.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