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October 07, 2008

편집자의 편지: 박성희씨, 안녕하시죠?

얼마 전 어느 탈북인과 술을 마시다 ‘임수경’씨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그는 아직도 ‘림수경’이라고 발음했습니다. 필자에게도 임수경보다는 림수경이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름, 1989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당시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씨는 여전히 북한에서는 ‘영웅적’인 인물이요 ‘통일의 꽃’입니다. 그런데 북한정권은 임수경씨를 체제홍보의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하려 했지만,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청바지에 티셔츠를 차려입고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임수경씨의 행동은 오히려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의 자유’를 느끼게 한 하나의 계기였다고 합니다. 지구를 한바퀴 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이, 생각있는 북한사람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지요. 전대협도 물론 이런 점을 의도하였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밀입북 1호’였던 임수경 이후 전대협,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총련은 이른바 ‘방북투쟁’이라는 이름아래 해마다 학생들을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박성희(91년), 성용승(91년), 최정남(94년), 정민주(95년), 이혜정(95년), 류세홍(96년), 도종화(96년), 김대원(98년), 황선(98년), 황혜로(99년). 이렇게 숱한 사람들이 자칭 타칭 한국 대학생의 ‘대표’가 되어 북한 땅을 밟고 왔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임수경씨입니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386 정치인들의 ‘5·18 광주 술판’을 이슈화하여 다시 한번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중에 혹시 박성희씨를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 제가 임수경씨 이야기를 꺼낸 것은 사실 바로 이 ‘박성희' 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박성희씨 역시 ‘방북대표’였습니다. 1991년 당시 경희대 작곡과 4학년이었던 성희씨는 부모님께 “배낭여행을 다녀오겠다” 인사하고 그 해 6월 24일 김포공항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가 택했던 배낭 여행지는 일반적인 대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땀흘려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으로 찾는 유럽의 박물관이나 북미의 눈부신 호수 같은 그런 ‘평범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조직 ‘전대협’이 지시한 배낭여행지(?)는 바로 ‘반세기 금단의 땅’ 북한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베를린으로 간 성희씨는 1991년 8월 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그는 “나의 방북이 5분이라도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면 하는 믿음에서” 북한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북한에 도착한 성희씨는 대표로서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습니다. ‘백두-한라 통일대장정’에 참여하였고 평양에서 열린 ‘청년학생통일회담’에서 북한측과 <조국통일 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결성을 결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그는 남한으로 ‘귀환’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대협은 그에게 또 다른 임무를 주었습니다.

성희씨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 베를린으로 다시 날아갔습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베를린에서 성희씨가 할 일은 범청학련 건설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것. 외로움, 배고픔과 싸우며 완전히 ‘제로(0)’의 상태에서, 졸지에 국제미아 신세가 되면서도 그녀는 이 임무도 마다 않고 시작했습니다. 범청학련 남북해외 공동사무국장을 맡아 몇 년간 전대협, 한총련과 북한을 잇는 교량자 역할을 하던 성희씨의 가슴에, 그러나 돌아온 것은 ‘좌절’과 ‘혐오’였습니다.

1998년 8월 7일, 성희씨는 영영 못 돌아올 것 같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23살 처녀의 몸으로 나섰던 김포공항에, 이젠 서른 살 아줌마가 되어 말입니다. 갈 때는 혼자였지만 올 때는 예쁜 딸 초롱이와 남편, 그리고 4명의 동지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귀국 몇 일 후인 8월 19일 그녀와 동지들은 ‘반성의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북한추종주의 통일운동의 문제점과 한총련의 해체를 주장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변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을 북한에 보낸 ‘조직’과 통일의 든든한 한 축이라고 생각했던 ‘북한정권' 때문이었습니다. 객관적 현실을 무시한 채 무조건 ‘관철’만을 강요하며 범청학련을 자신들의 전위대쯤으로 생각하는 북한정권의 반(反)민주성을 접하면서, 또 이를 추종하며 노선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배신자’로 몰아붙이는 한총련의 맹목성과 싸우는 과정에, 그녀는 ‘전향’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녀와 함께 귀국하여 기자회견을 했던 네 명의 동지 중 두 명은 “‘변절자 박성희’의 지위를 박탈하고 범청학련을 재건하라”는 임무를 받고 밀입북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성희씨가 몇 년간 범청학련 사무국을 꾸려 오면서 북한정권과 한총련에 느낀 좌절과 혐오의 과정은 귀국 이듬해에 쓴 「베를린, 그리고 3천일 만의 귀향」(한울출판사) 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몸으로 체험하면서 북한의 진실을 알게 된 성희씨, ‘북으로 갔다가 북을 넘어 선' 그녀의 목소리를 이 자리에서 전부 전할 수 없기에 독자 여러분의 일독(一讀)을 권하며 1999년 문화일보에 실린 성희씨의 기고문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북의 체제는 모든 진리와 자주성을 수령이 독점하는 체제다. 거기에서는 인민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혁명적 군인정신’과 ‘유격대식 기풍’이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되는 북한에서 사회의 민주주의는 질식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의 핵심은 사회적 정체성의 확보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의 핵심은 바로 민주주의다. 남쪽에서 발전되어온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북에서 민주화를 진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통일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반 문제를 완충시키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 "

필자와 ‘임수경’을 이야기하던 탈북인은 “임수경은 직접 본 적이 없지만 박성희는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지금 박성희씨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제가 “박성희씨는 잘 모르지만 그녀의 남편과는 조금 아는 사이”라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그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박성희씨가 동료들과 함께 전향을 하였고, 이제는 북한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전혀 모르던 사실이라고 놀라며 무척이나 기뻐하더군요. 그리곤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겐 ‘박성희가 북한민주화에 뜻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북한에서 ‘전대협 대표 박성희’를 만나던 기쁨보다 더 큰 동지애를 느끼게 했나 봅니다.

박성희씨. 분명 이 글을 읽고 계시겠죠? 1991년 박성희씨 곁에서 어깨 걸고 ‘연방제 통일’과 ‘주한미군 철수’의 구호를 외쳤던 그 날의 그 북한 대학생, 신의주 관서대학 - 당시에는 신의주 제1사범대학 - 학생이었던 ‘김은철’씨가 성희씨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잘 지내시죠? 당당하고 예뻤던 성희씨의 모습을 보며 남한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1999년에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여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이러니 무슨 'TV는 사랑을 싣고’를 하는 기분이네요. 아무튼 세상은 참 묘한 ‘관계의 뒤엉킴’으로 잔잔한 즐거움 - 사는 재미를 느끼게 합니다. 북한 추종적 통일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신념에 불타 평양행 비행기를 탔던 남한의 운동권 여학생, 그리고 그의 모습에서 ‘자유’를 배운 북한의 동갑쟁이 남자 대학생. 그 운동권 여학생은 3000 일의 이국살이 과정에 진실을 깨달아 고향 땅을 밟았고, 이제 남녘으로 도망쳐 온 남자 대학생은 북한이 민주화되는 날 고향 신의주로 돌아갈 것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성희씨는 남한으로 다시 돌아 왔고, 이제 은철씨가 다시 북한 땅을 밟아야 할 차례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그 길을 여는 ‘열쇠’가 되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