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06, 2008

호세 알바레스 훈코 “스페인 군·경, 과거사 청산 거리낌 없어”



[인터뷰] 스페인판 ‘과거사법’ 제정 참여 호세 알바레스 훈코 교수


스페인 의회는 지난해 말 ‘역사적 기억법’이란 추상적 명칭의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스페인 내란과 프랑코 장기독재 체제에서 있었던 불행한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한 법이다. 법의 뼈대는 △내전과 독재 치하에서 있었던 사법판결의 정당성 부정 △프랑코 독재 상징물의 철거 △희생자 유족에 대한 금전 보상 △방치된 희생자 주검 발굴 △내란 관련 문서보관소 설치 등이다.

스페인 내전은 20세기 전반 유럽을 강타한 대표적 비극의 하나다. 1936년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군부의 반란으로 시작된 내전은 거의 3년에 걸친 유혈참극을 거쳐 반란군의 승리로 종결됐지만,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가 상징하듯 양쪽에서 수십만명이 숨지고 수백만이 국외 망명을 택하는 등 엄청난 비극을 남겼다.

마드리드에 있는 콤플루텐세 대학의 호세 알바레스 훈코 교수가 진실화해위원회 초청으로 잠시 서울을 방문했다. 스페인 근현대사의 권위자이며, 소르본·하버드·파도바 대학 등 구미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그는 대통령부 정치헌법학센터 소장 자격으로 역사적 기억법 제정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자신의 학문을 정치학 절반, 역사학 절반이라고 설명하는 그를 9월30일 만나 스페인 과거청산 작업 전반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먼저 내란이 시작된 지 70여년이 지나서 뒤늦게 법이 제정된 이유부터 물었다. 훈코 교수는 프랑코가 숨진 1975년까지는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전제하고, 프랑코 사후에도 취약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의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군부 등 보수세력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프랑코 체제의 상징물도 일체 제거하지 않고, 내전 당시의 잔인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는 사면법이 정치권의 합의로 77년 제정됐다.

내전의 깊은 상처를 직시하기를 기피한 스페인의 이런 풍토는 2004년 총선에서 당시 44살의 사파테로가 이끄는 사회당이 승리하면서 깨졌다. 사파테로는 취임 직후 자신의 선거공약의 하나인 과거사 정리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 합동위원회를 구성하고 2006년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보수 야당인 국민당, 가톨릭교회, 보수 언론은 사파테로가 오랜 상처를 다시 건드려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과거 회귀적 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보수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작년 10월 하원, 12월에는 상원을 통과해 발효됐다. 훈코 교수는 상황이 달라진 배경을 세 가지 요소로 풀이했다. 첫째 과도 이행기에는 민주주의가 취약했고 심지어 1981년에는 심각한 쿠데타 기도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공고화됐다. 둘째 경제발전이 계속돼 삶의 수준이 훨씬 나아졌다. 셋째 내전 체험자들의 ‘손자 세대’ 등장이다. 훈코 교수 같은 ‘아들 세대’는 내전의 참혹함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고 자라 무엇보다도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지만, 현재 30~40대의 손자세대는 아무 두려움 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페인의 일반 대중이 과거사 정리 작업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훈코 교수는 법안이 스페인 사회에서 강력한 반대도 없었고 열렬한 지지도 없이 통과됐다는 점을 인정했다. 국민당과 가톨릭교회는 법의 내용이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온건한 것으로 채워지자 통과 후에는 무시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올해 3월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은 이 법을 쟁점으로 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법의 취지에 대해 어느 정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과거사 정리 작업과 대조되는 것은 군부와 경찰이 적극적으로 법의 취지에 협조를 한다는 점이다. 스페인 군대는 프랑코 시절의 군부와 아무 상관이 없다. 징병제는 폐지됐고 모두 직업군인으로 구성돼 있다. 군인들이 하는 유일한 일은 유엔 평화유지 사업에 참여해 유럽의 다른 군대와 협력하며 민주적 풍토를 배우는 것이다. 내전 시절 엄청난 잔혹행위를 저질렀던 경찰도 군부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민주화됐다. 이들은 내전 당시의 관련 자료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살라망카에 설치키로 한 문서보존소에 제출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의 과거사 작업이 중남미와 남아공과 다른 점은 학살이나 잔혹행위 책임자를 정부 차원에서 조사하거나 형사소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월이 오래 경과돼 잔혹행위의 주역들이 실질적으로 모두 사망한데다 사면법을 일찍 제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페인에서 정의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나? 이 물음에 훈코 교수는 물론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의가 범죄적 행위가 이뤄지기 전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이라면 정의를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내세웠다. ‘제한 없이’ 모든 진실을 아는 것이 신뢰를 갖는 최선의 비용이고 민주주의는 신뢰의 비용 위에 확립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한국의 과거사 규명 작업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짧은 일정에 실제로 본 것이 별로 없어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밝혔다. 3년 동안의 내전, 장기 독재체제 지속 등 스페인과 형식적 유사성이 있지만, 분단대치 상황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훈코 교수는

●1942년생 ●콤플루텐세 대학에서 스페인 무정부주의 연구로 박사

●멕시코 하버드 소르본 옥스퍼드 대학교수 등 역임 ●현재 콤플루텐세 교수, 정치사상과 사회운동








글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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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 일답


2007년 말 스페인 의회를 통과한 <역사적 기억법>의 제정 작업에 주요 역할을 한 호세 알바레스 훈코 교수가 9월30일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해 김효순 대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김=첫 방한인가? 첫 인상은 어떤가?

훈코=서울 밖으로 나가지 못해 실제로 본 것이 별로 없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상황이 현재의 스페인보다 분명하지 않다. 프랑코 사후 프랑코의 군부가 그대로 남아있던 과도이행기 무렵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 내전 끝났지만 프랑코 미국 지지받아 25년간 생존


김=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스페인은 낯설다

훈코=스페인은 16세기 유럽의 큰 대국이었지만 점차 세력이 약화됐다. 특히 1898년 미국과의 재앙적 전쟁에서 져 쿠바, 푸에르트로리코, 필리핀 등을 잃고 모두 위기를 느꼈다. 모두 근대화를 얘기했지만 생각이 달랐다. 한쪽에서는 세속국가, 가톨릭 교회의 비중 축소, 권력분산, 교육확대를 말했다. 다른 쪽에서는 16 ,17세기의 ‘대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것 , 즉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단결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들이 스페인의 재생이 필요하다고 동의했지만 방식을 달리 해석했다. 1930년대 들어 도시지역과 전통적 농촌지역의 긴장이 고조돼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은 잔혹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의 규모뿐만 아니라 죽임의 방식에서 그랬다. 다수의 희생자들은 암살되거나 한 밤중에 집에서 끌려나와 공동묘지 등에서 바로 처형됐다. 내전은 프랑코 장군의 반란군이 가톨릭 교회와 파시스트 당의 지지를 받아 이겼다. 프랑코 정권은 히틀러와 무솔리니 체제와 비슷했지만, 프랑코는 교활하고 신중해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았다. 히틀러 무솔리니가 사라진 후 프랑코는 1945년부터 49년까지 고립됐으나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프랑코 체제는 그가 사망하는 1975년까지 계속됐다. 그 25년 동안 스페인은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뤘다. 1인당 국민소득은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 됐고 영국에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 경제적 성공이 프랑코 사후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비교적 순조롭게 했다. 그의 사후 3년간 이행기가 있었고 1982년 처음으로 사회당이 집권에 성공했다.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고, 경제발전이 지속됐다. 이 시점에서 내란의 희생자들을 기억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김=내전 발생 이후 법 제정까지 70여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인가?

훈코=프랑코 집권 40년간은 물론 가능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민주주로의 이행기에는 어떤 불문의 합의가 이뤄졌다. 하나는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전기간 중 프랑코 협력자중에 잔인한 행위가 많았지만 학살은 양쪽에 다 있었다. 또 하나는 프랑코 체제의 상징물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세기 스페인 혁명이나 1930년대의 2공화국 때 주요 거리나 광장 이름을 바꾸는 상징적 조처가 있었다. 좌절감을 느낀 대중들이 국왕의 이름 대신 ‘자유광장’이나 ‘헌법 광장’이란 식으로 명명했다. 이행기에는 그런 상징적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실무적으로 했다. 내전기간 중 잔인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도 77년 10월 사면법이 제정됐다.

김=역사적 기억법의 건축자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관여하게 됐나?

훈코=내가 주도한 것이 아니고 위원회의 한 사람일 뿐이다. 나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단지 위원회 구성원 가운데 내가 유일한 역사가로서 내란과 2공화국 관련 부분에 조언을 했다.


▷ ‘스페인 아이들 보호 위해’ 소련·멕시코로 대피

김=위원회는 의회에서 구성한 것인가?

훈코=관련부처 고위관리들로 구성된 정부위원회이다. 당시 법적 조처의 정당성을 따지고 희생자 지원 조처 등을 다루기 위해 국방 재경 법무부서 등이 들어왔다. 외무부도 포함됐다. 이른바 ‘스페인 아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당시 공화파의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 특히 소련 멕시코로 대피시켰다. 이들은 거기서 60~70년을 보냈다. 이제 아주 늙은 노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김=법 이름이 왜 역사적 기억인가? 스페인의 역사 맥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건가?

훈코=법 자체는 역사와 별로 상관이 없다. 역사적 기억법은 정식명칭이 아니다 저널리즘이 그렇게 붙인 것이다. 정식명칭은 아주 길어 <내전 및 독재기간 중 있었던 탄압과 폭력 피해자를 위한 권리 인정과 확대조처를 위한 법>이다. 기본적으로 내전 희생자들에 대한 법이다.

김=언론이 역사적 기억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따로 있나?

훈코=모르겠다. 하나의 유행이다. 정부조차 유행의 덫에 빠졌다. 새로 설치되는 ‘역사적 기억 문서보관소’에서 이름을 따왔을 수도 있으나 왜 그 이름을 고집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역사적 기억이라면 과거에 일어난 모든 것이 해당된다.

김=이 법은 사파테로 총리에 의해 주도됐다. 그가 2004년 총선에서 승리했을 때 44살의 비교적 젊은 정치인이었다. 지난 30년과 비교해 어떤 변화가 있었길래 이 법이 통과됐나?


▷ ‘손자세대’ 진실 밝히는데 두려움 없어


훈코=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공고화됐다. 70년대는 민주주의가 취약했고 심지어 81년에는 아주 심각한 쿠데타 기도까지 있었다. 당시 우리는 민주주의의 성공에 대해 자신을 가질 수 없었으나 이제는 달라졌다. 경제발전이 계속돼 이전보다 삶의 수준이 훨씬 나아졌다. 세대의 변화도 있었다. 지금의 30~40대는 내란 체험자들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 세대’이다. 그들은 파시스트에 대해 아무 두려움이 없다. 나 같은 ‘아들 세대’는 내란의 잔혹 처참한 양상에 대해 수많은 얘기를 듣고 자라,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손자 세대는 아무 두려움이 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한다.

김=법 제정과정에서 많은 저항이 있었을 텐데 가톨릭 교회와 군부의 반응은 어떠했나?

훈코=가톨릭교회는 전반적으로 반대하는 자세였다. 사파테로는 2004년 총선에서 많은 것을 공약했는데 기본적으로 이 법은 공약 중에서 가장 늦게 실현된 것이다. 내용도 완화됐다. 법 제정과정에서 보수계 신문, 가톨릭교회, 보수정당인 국민당은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작년 말 법안이 통과된 이후 이들은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2008년 3월 총선에서도 거의 쟁점으로 삼지 않았다.

김=그렇다면 이 법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나?

훈코=현 시점에서 어떤 공감대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국민당은 이 법에 대해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기자들이 물어보면 법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만, 관심이 없다는 식이다.

김=이해가 잘 안 된다. 법안 심의 때 국민당은 사파테로가 오랜 상처를 다시 벌린다고 비난했다.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지향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는데 정치 풍토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거냐?

훈코=국민당은 당초 생각보다 법안이 과격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다. 국민당 전체라기보다는 당안의 일부 세력과 가톨릭의 일부 진영이 이 법의 제정 반대에 대단히 전투적이었다. 스페인 국민들에게 내란을 먼저 상기시킨 것은 가톨릭 교회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당시 희생된 가톨릭 사제들을 성인으로 인정하는 시성 작업을 1990년대에 추진했다. 이 법 제정보다 훨씬 일찍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군부의 반대는 없었다. 군부는 극적으로 바뀌었으며 프랑코 시절의 군대와 아무 상관이 없다. 군부는 아무런 주저 없이 당시 내란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살라만카에 세우려고 하는 문서보존소에 보내고 있다. 스페인의 징병제 는 폐지됐고 군인들은 모두 직업군인이다. 그들이 하는 유일한 일은 유엔이 하는 평화유지 작전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영어를 하며 유럽의 다른 군대와 협력하기 때문에 많이 변했다. 당신이 군인들에게 프랑코에 관해 묻는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답을 듣게 될 것이다. 군부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경찰도 마찬가지이다. 내전 기간중 그들은 엄청난 잔혹행위를 저질렀지만 그들도 모든 관련자료를 아무 문제 없이 제출하고 있다.


▷ 책임자 모두 사망…진상규명이 더 쉬워


김=군부독재를 경험한 중남미의 군부는 반동적 경향으로 알려져 있는데 스페인 군부가 그렇게 바뀐 이유는 뭔가?

훈코=중남미에서는 독재가 끝난 후 경과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다. 중남미의 군부독재는 70~80년대이고 스페인 내전은 30년대의 일이다. 70년 전의 일이라서 당시 군사적 정치적 책임을 질 사람은 현실적으로 모두 죽었다. 중남미에서 중요한 문제는 누구를 기소하느냐였지만 스페인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모두 죽었으니까. 스페인의 과제는 무엇이 있었던지를 분명히 해서 진상을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용이한 일이다.

김=대표적 진보 신문 <엘파이스>조차 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배경이 무엇인가?

훈코=스페인 일반 대중이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위원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게 좋은지 여론 조사를 하면 유해발굴 등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는 쪽이 많다. 하지만 소수의 피해자단체들은 물론 대단히 관심이 많다.

김=법안이 대중의 열렬한 지지나 지원 없이 통과됐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

훈코=그렇다. 강력한 반대도 없었고 열렬한 지지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파테로의 개인적 공약이라고 주장한다. 왜냐 하면 그의 할아버지가 프랑코 세력에 의해 총살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사회당 정부 안에서도 이 법에 대해 열렬히 지지하지 않는 요소들이 있다.

김=당사자들이 모두 죽었다고 처벌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전혀 없었던 건가?

훈코=죽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법적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있었다. 70년대에 모두가 동의했다.

김=그렇다면 스페인에서 정의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나?

훈코=물론 아니다. 과거에는 아무도 정의라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정의라는 묭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느냐? 정의가 범죄적 행위가 이뤄지기 전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이라면 정의를 세울 수가 없다. 만일 당신의 아버지가 그 당시 죽었다면, 당신이 20년 동안 감옥에 수감돼 있었다면 그런 경우 정의가 실현될 수 있나?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인데 죽었으니 할 수가 없다. 정의를 말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 대신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무제한으로 모든 진실을 알고 싶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우리 사이의 신뢰를 갖는 최선의 비용이다. 민주주의는 신뢰의 비용 위에 확립돼야 한다. 침묵이나 공포의 비용이 아니라.

김=희생자 유족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훈코=유해가 아직도 발굴되지 않았을 경우 찾아내 정중하게 매장하는 것, 그리고 공식으로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은 마을에는 학살자의 손자들이 근처에 살고 있다. 그러면 모든 마을 사람들의 참가 하에 학살된 사람들이 양민이었다고, 그런 처참한 운명을 겪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본이다.

김=유골이 발견되면 일반적으로 그 지역에 매장되나?

훈코=어떤 방식이든 유족이 원하는 식으로 한다. 어떤 가족들은 들판이건 어디건 발견된 장소에 그대로 안치하기를 희망한다. 기념비나 추모비와 함께. 어떤 가족들은 유골을 인수해 공동묘지에 매장한다. 유족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김=혹시 국가 차원의 추도묘지를 건립할 계획은 없나?

훈코=없다. 프랑코는 자신의 주검이 안치되는 전몰자의 계곡에서 그런 계획을 실현하려고 했다. 일부 유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란에서 양쪽의 희생자 수천명을 매장했다. 우리는 전몰자의 계곡은 그대로 두되 정치적 행위는 못하게 하고 있다.

김=관련자료를 살라만카에 모은다고 하는데 그 도시가 내전과 어떤 연관이 있나?

훈코=불행히도 그렇다. 살라만카는 반란군의 수도였다. 프랑코 자신이 그곳에서 2~3년 살았다. 프랑코는 정당 노동조합 등에서 탈취한 모든 자료를 살라만카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그는 좌파들의 모든 자료를 압수할 것을 바랬다. 의도는 좋지 않았지만 역사가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많은 자료가 보존된 셈이다. 반대로 좌파진영은 우파로부터 탈취한 모든 자료를 소각하고 건물도 불 태워버렸다. 그래서 내란문서보관소가 있었다. 자료를 다 모아서 역사적 기억 문서보관소를 설립해 통합하는 것이다.


▷ 피노체트 담당 판사, 실종·사망자 정보 공개 요구


김=법 통과 이후 실제로 이뤄진 구체적 변화는 무엇이 있나?

훈코=중요한 것은 없다.

김=상징적 변화란 의미인가?

훈코=프랑코의 동상이 2~3개 있는데 이미 철거됐거나 진행 중에 있다. 프랑코나 반군 세력의 이름이 부쳐진 거리 이름도 바뀌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자 유골 발굴 작업에 진력하고 있는 ‘역사적 기억 회복협회’ 같은 단체들이 정보의 보조금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중요한 변화는 지난 9월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가 갑자기 내란과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실종됐거나 살해된 모든 사람의 정보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가르손 판사는 가톨릭교회와 지방의회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는 인도주의에 대한 죄, 대량학살죄 협의를 걸 수 있을지를 검토하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진전이 될지 현 시점에서는 모르겠다. 그는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우려 했던 판사이다.

김=역사적 기억법과 상관없는 독립적 행위인가?

훈코=직접 관련은 없다. 하지만 법 통과와 연관돼 전개되고 있는 발전이다. 대량학살죄는 양쪽이 다 해당될 수 있다. 단지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또는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사람들이 있다.

김=내전을 후세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정치권에서 논의가 있나?

훈코=정부차원에서는 내전에 관한 공식적 책이 있기를 희망한다. 다른 한편으로 스페인의 교육제도는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안달루시아, 카탈로니아 지방정부들은 각기 지방의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계 학교들도 가톨릭 시점에서 역사를 가르친다. 정부의 영향은 제한적이다.


▷ 가르손 판사 ‘새로운 시도’ 따라 희생자 수 달라질 것


김=스페인에서 과거사 정리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훈코=엄격히 말하면 오직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의 새로운 시도에 달려 있다. 그가 성공하면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내전 때 희생자들의 추정치 수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가르손 판사의 시도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다.

김=한국의 과거사 규명작업에 한 마디 조언을 한다면?

훈코=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형식상 유사성은 있다. 3년간의 내전이 있었고 거의 40년에 이르는 독재체제가 있었다. 여전히 분단상황이고 북한의 독재체제가 있다. 강력한 정부, 보수적 정책을 지지하는 층들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스페인과 다른 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실은 감춰지지 않고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