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30, 2008

Ham, Seok Heon, the philosopher

이사람] 함석헌의 ‘무교회 정신’이 사라졌다
씨알사상 책 펴낸 조향균 계성종이박물관장


한승동 기자



» 작고 1년 전인 1988년 여름 한국퀘이커교 대표였던 함석헌(앞줄 왼쪽 두번째) 선생이 회원들과 함께 당시 서울 화곡동에 있는 조형균(앞줄 왼쪽 첫번째)씨네 자택을 방문했을 때 찍은 기념사진.



“도쿄 조직은 100개 넘어 한국과 대비”
사상적 후예 자처…역사 수필도 펴내



» 조형균(80·계성종이박물관장)



한국 최고의 종이 전문가이자 함석헌 사상 연구가로서 한-일관계를 비롯한 역사 바로잡기에 삶을 받쳐온 ‘평생 평신도’ 조형균(80·계성종이박물관장)씨가 두 권의 책을 함께 냈다. 하나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신앙과 민족문제, 선학들에 대해 쓴 에세이들을 엮은 <씨알(아래알)의 오솔길-상>, 또 하나는 2차대전 뒤 역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며 패전국 독일과 일본, 그리고 한국인들의 자기점검에 대한 글들을 모아 묶은 <역사 신앙 고백>(그물코 출판사)이다.

조씨는 <씨알(아래알)의 소리> 회보 등에 쓴 글을 가려 모은 이 책을 “무어 특별히 내놓을 만한 글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생각의 오솔길에 주어진 작은 거둠들을 매개로 독자 제현과 진솔한 대화라도 나눴으면 하는 생각에서 내놓는다” 했다. 하지만 지난 5일 출판기념회에서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삭개오 작은교회 담임목사)가 “이 책에 실린 글이 이제까지 나온 씨알(아래알)에 대한 글들 중에서도 가장 폭넓고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고 평가한 것처럼 책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 많은 글에서 변주되는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과 광복 뒤에도 그 치욕을 발전적으로 극복해내지 못한 우리 현실에 대한 통렬한 회오는 독도문제가 다시 불거진 지금 새삼 시시하는 바가 크다.

그와 함석헌 선생의 인연은 깊고도 각별하다. 그에게 민족의식을 가르쳤고 일제 때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른 부친 조세장 장로가 마지막 남긴 글이 ‘함석헌’ 이름 석자였다. “그 분(함석헌)이 1947년 3월24일 월남하셨는데 그해 마침 서울대 문리대 기독학생회의 전도강연회에서 밤 강사로 등장한 그 분과 청중의 한 사람으로 처음 만났지요. 그 후 그분이 쓰신 글이 실린 잡지나 단행본은 무조건 사서 읽었지요.” 그는 “그 분과 코드가 맞았고 장성하면서 지적 욕구도 그 분을 통해 채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고수해온 무교회정신의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에선 함석헌이고 일본에선 우치무라 간조인데 그들 사후 한국과 일본이 걸어간 길은 너무나 대조적이라며 그것을 “함석헌의 비극”이라고 했다. “일본에선 우치무라의 정신을 이어받은 무교회 조직이 도쿄지역에만 100개가 넘고 오사카에서도 그의 정신이 50여군데나 가지치기를 하며 착실히 성장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함석헌의 정신을 옳게 이해하지 못했다. 사회 참여 활동같은 빙산의 일각만 기억할 뿐 잠겨있는 거대한 부분엔 이르지 못했다. 우린 교회적 종교, 그 조직과 교권 등 외형은 그럴듯하게 성장했지만 기독교 생명은 쇠잔했다. 겨우 잡지 하나로 그 명맥을 이어왔는데, 거기에 글을 쓰면서 그 분과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눈 게 바로 이 책이다.”

<역사 신앙 고백>에는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도 눈먼 자가 되는 것”이라며 과거 잘못에 대한 숨김없는 고백과 그것을 토대로 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촉구한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독일 대통령의 국회연설문 ‘광야의 40년-1945년 5월8일과 그 후 40년’, 일본 무교회주의자 다카하시 사부로의 ‘전후 일본의 재건과 미주(迷走)’, 그리고 함석헌, 김재준, 한경직, 김경재, 박상증 등의 글도 함께 실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조형균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