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0, 2007

Korean German Exiled Professor Song, the Afterm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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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22일부터 다음해 8월5일까지 한국에 머문 10달여 동안(그중 9달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서 보냈다) 보수-진보 등 세력갈등의 진원지였던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가 사건 이후 처음으로 당시를 되돌아보는 책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후마니타스)를 냈다. <경계인의 사색>을 낸 뒤 5년간의 공백 끝에 나왔다.
그는 서문에서 당시 사건에 대한 기억을 “필자 자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당시 한국사회가 경험했던 ‘집단적 기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때로는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지만 다시 살려내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또 이를 (한국사회와) 공유해야 할 의무를 느껴왔다”며 집필 동기를 밝혔다. 이는 그가 “광기와 폭력이 난무했던” 상황으로 파악하는 당시 사건을 한국사회가 너무도 쉽게 당시 사건을 망각해버린 채 아무런 생산적 교훈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의 연장이며, 그것은 이 책 기획자의 착안점이기도 하다.
2003년 9월22일, 36년 2개월 만에 고향땅을 밟은 송 교수는 한달 뒤인 10월22일부터 다음해 7월21일까지 서울구치소 독방에 감금당했다. 책은 이때의 불편했던 기억을 실명까지 거론하며 구체적으로 더듬는다. “독일 영사는 (서울구치소가) 수감중인 미군 병사에게는 책상은 물론 침대와 냉장고 시설까지 허용하면서 저술이 본업인 독일대학의 (송)교수에게 최소한의 편의도 제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항의했다.”
그는 당시 유력지들이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았다며 한마디로 “썩은 내 나는 신문들”이라 질타했다. 검찰과 법원의 권위주의도 그에겐 너무 힘들고 낯선 풍경이었다. “도주나 자해의 위험이 없는데도 수갑만 채운 것이 아니라 포승에 묶인 상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공간이다.” “…그들(공안검사들)의 특권의식은 좀 유별난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검사들의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들이 보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어요. ‘아직도 김일성을 존경하느냐’는 질문을 해대질 않나, 계속 그런 식의 취조였어요.”
송 교수는 독일 현지에서 진행한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 김용운 기획위원과의 대담에서, 안전보장 확인도 없이 어떻게 귀국했느냐는 질문에, “떠날 때는 (구속 따위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면서 국정원에 직접 가서 조사받기로 약속한 바도 그렇게 한다는 얘기도 사전에 들은 바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선처를 호소한 자성의 글을 발표한 것은 상황파악이 미숙했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투항이기도 했다는 비판에 대해선 “그 문제를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주변사람들의 종용에 넘어간 점, 그리고 같은 맥락의 독일국적 포기도 아쉬워했다.
송 교수는 한국에서 초청할 경우 응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전보다 더 심리적으로 어려운 선택이 되겠지요.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남한이든 북한이든 자유롭게 다니며 가르치고 대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늘 있지요. 기본적으로 이분법적 이념이나 편견, 단순논리에 의해 희생되지 않고 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으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갈 수 있느냐 아니냐가 여전히 내겐 더욱 절실한 문제입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