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06, 2007

김성수님의 "함석헌 평전"을 읽고

김 조 년
1. 책이 출판된 뜻
저자는 다음과 같이 아주 소박하게 자신의 희망을 표현한다. "태평양 한 가운데에 빗방울 한 방울이 더해지듯이, 이 책이 함석헌의 거대한 사상적 유산을 더하는데 하나의 작은 빗방울이라도 될 수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겠다."(204쪽)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바람을 넘어 이 책은 함석헌 이해에 큰 가닥을 잡는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 분명하다.
책이 집필되고 출판된 시기가 함석헌을 따르고 기억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때였으며, 사회가 바뀌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이 된 지금 함석헌이라는 이름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는 때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우리의 정치상황이 어지럽거나 사회가 불안하여 답답할 때 속시원히 말해줄 사람을 그리워하고, 이러한 때 '선생님이라면 무어라 말씀하셨을까'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그이의 책을 읽은 적도 없고 심지어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수없이 많은 세월이 지났고, 아주 딴 세계에 살았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원효, 최치원, 이율곡, 정다산, 칸트, 헤겔, 흄, 로크, 룻소 따위의 이름을 아주 많이 들어본 적은 있지만, '원효이래 가장 큰 사상가'라고 칭송을 받기도 하는 함석헌이 우리와 같은 시대에 어떻게 호흡하고 살았었는가를 아는 싱싱한 젊은이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가진 함석헌의 제자들이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통하여 함석헌의 사상을 젊은 세대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단법인 "함석헌 선생 기념사업회"를 결성하여 그를 기리고 전파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한 가지 사업이 함석헌이 말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전두환 정권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던 잡지 "씨알의 소리"를 복간하여 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그 잡지가 제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그에 대한 의견이 매우 분분한 상태다. 계속하여 그 잡지를 내야 한다는 의견과 함석헌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잡지 역시 없어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 두 의견 모두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지만, 잡지 "씨 의 소리"는 격월간으로 계속 출간되고 있다. 다만 그 내용의 질과 강도가 만족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함석헌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수단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사상과 활동, 삶과 뜻을 가름하여 본 사람들은 그의 그러한 것들이 꺾이거나 중단되지 않고 계속 퍼져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살고 활동하였던 시기와 지금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시간상으로 본다면 우리의 시대와 그가 살았던 때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대정신을 탄생시키는 시대의 흐름은 너무나 차이가 많다. 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이 심각했던 시대, 남의 힘으로 해방이 이루어져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국가를 이끄는 이념과 운영체계가 달라 나라가 두 동강으로 잘려진 시대, 그래서 반공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우선하던 시대, 그것은 독재정권을 용납시켰고, 혼란한 틈을 타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반공과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인권과 개인의 자유와 생존권을 위한 투쟁과 언론자유가 완전히 보류되어 민주주의가 멀리 보이던 시대였다. 이 때 뜻 있는 사람들은 양극으로 갈라지던 상황이었다. 좀더 도덕을 강조하고 명분과 실제를 일치시키려는 이상주의의 경향과 좀 더 약삭빠르게 현실에 민감한 사람들은 현실론을 내세워 현실정치와 함께 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던 방향으로 갈라지던 시대였다. 사회가 다양한 생각과 행동양식을 허락하지 않고 흑백논리에 버릇되어 있었고,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게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했던 시대다. 적어도 함석헌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까지는 보다 나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위하여 애쓰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인정되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신이 달라졌다. 민족의 고유함을 말하기엔 그것들을 규정하던 각종 경계가 흐려진 글로벌화가 여러 분야에서 확산되어 실현되었고, 매판자본과 민족자본을 논의하기엔 자본의 국적과 물질생활의 현주소가 지나치게 복잡하여 졌으며,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말하기엔 산업사회를 훨씬 지나 정보(화)사회에 접어들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기에는 형식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대로, 이데올로기와 통일을 주장하기에는 상당한 부분까지 그것들이 무의미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억압과 탄압을 무릅쓰고 함석헌이 이루려 하였던 것들이 현실생활에 다가 온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와 가치가 퇴색한 것으로 보이는 때가 되었다. 그가 긴 생애를 사는 동안 아주 깊이 우리의 현실문제에 개입하였기에 그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그가 마치 지금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있는 듯이 느끼는 것은 큰 과오가 아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그를 기억하기 바라는 것은 어떤 면으로는 지나친 욕심인지 모른다. 그가 탄생한 때로부터 한 세게 100년이 지났기 때문만도 아니다. 시대의 흐름이나 사람들의 마음과 관심이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루고자 하였던 사상체계와 삶과 현실을 본다면 그를 그리워하고 다시 되살려 보려는 노력이 결코 헛된 욕심이나 허황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바로 이러한 때, 그가 탄생한지 100년이 되는 금년에 함석헌 기념사업회에서 함석헌을 널리 알리고 되살리기 위한 노력으로 많은 언론 매체와 학술행사, 기념강연이나 전시회 그리고 많은 출판물을 준비한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이에 맞추어 나온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체계를 처음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은 매우 귀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지금 젊은이들이 80년대에 한길사에서 20권으로 출판한 "함석헌 전집"을 읽기에는 시간과 능력과 시대흐름이 맞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간편하고 잘 정리된 책이 매우 필요한 때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이 출판된 것은 그 필자의 노력에 대한 찬사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일이다.
2. 책의 구성과 연구방법
저자 김성수는 함석헌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특별히 선생님의 영향으로 나는 철도 공무원에서 역사가, 골통 보수 기독교인에서 종교적 관용주의자, 복음주의자에서 인도주의자, 교조주의자에서 낭만주의자가 되었다. 내게 역사와 철학의 맛을 알게 해준 분도 선생님이고, 무엇이 인생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가를 깨우쳐 준 분도 선생님이다. 내게 선생님은 진리, 도, 하느님을 보여준 마음의 창문과 같은 존재다. 그가 살아서 그의 가르침과 영감이 내 인생에 어떤 열매를 거두게 했나 보셨으면 하는 염원도 감히 해본다. 그가 남겨 준 따스한 사랑과 들사람얼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항상 나와 함께 하리라 확신한다."(11쪽) 이 말을 상기한다면, 저자는 전혀 함석헌을 객관화하여 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 한 것처럼, 김성수는 함석헌과 가졌던 친밀한 관계를 떠나 '영웅 함석헌'에 대한 글이 아니라, '함석헌 비판'을 하기 위한 자기소외의 아픈 과정을 겪어야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위대한 함석헌' 뒤에 가려 있는 '인간 함석헌'을 보아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업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한국사, 한국기독교사, 세계사와 동아시아사를 연구하였고, 그와 비교될 많은 인물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을 공부하였다. 그런 뒤에 함석헌이 남긴 글들을 몇 번씩 반복하여 읽고, 함석헌과 관계를 맺었던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수행한다. 동시에 함석헌에 관하여 쓴 글들과 활동할 때의 신문과 잡지들을 귀한 연구자료로 삼는다.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하고 정리하기 위하여, 1) 자유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운동가로서의 역할, 2) 혁신적인 그의 종교관, 3) 개인의 영적 완성과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관계, 4) 우주에 산재해 있으면서 개인의 양심과 자연에 내재해 있는 신의 존재를 염두에 두면서 그 시대가 주는 역사적 도전과 대응을 분석한다. 그의 생애를 종교적 확신과 활동을 중심으로 집중하여 분석하고 있다. 그와 같은 것은 원래 이 논문이 한국의 퀘이커 교도로서의 기독교 사상가로 규정된 함석헌의 사상과 활동을 연구 분석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한 논리 전개는 개인의 시간흐름으로 분석한 이 책의 각 장의 제목들이 잘 알려 준다; "사자섬 아이에서 생각하는 기독청년으로", "감방대학에서 노자를 만나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이 남긴 것" 그리고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가 바로 그것들이다. 함석헌의 종교편력이나 신앙체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사회활동을 따라 시간흐름을 밟아가면서 분석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상체계나 행동양식의 체계를 따라서 한 인간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애를 정리하여 기술하는 보통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3. 책이 공헌한 것
함석헌은 일정한 직업이나 전문분야에 종사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한 두 가지 대표할 용어로 그를 규정할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언론인', '종교가' 라고 애매하게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사람들은 또 그를 '종교사상가', '한국의 양심', '싸우는 평화주의자', '한국의 간디' '민권운동가', '무교회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등으로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별칭들은 그가 특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관심을 가지고 한 일의 분야나 행동의 성격을 따라서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하여는 꼭 어느 특정한 틀 속에 그를 규정하여 넣지 않으면 안된다. 무수히 많은 다른 것들을 잘라 버리고, 오직 기술하고자 하는 분야에 해당하는 특성을 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김성수는 '생각하는 기독교인 퀘이커'로 규정하는 듯이 보인다. 그를 일생동안 지배한 것은 기독교임에 틀림이 없다. 또 장로교를 거쳐 무교회에 몸을 담았다가 마지막 30여년은 퀘이커에 자신을 투신하였지만, 어느 한 종파에 꼭 묶어 두어야 한다면 퀘이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가 장로교회 교인으로 있을 때나 무교회에 열중할 때나 역시 그의 기독교신앙의 바탕에는 퀘이커리즘이 맥맥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계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기성 교회의 형식과 조직을 싫어하면서 자기 내면에 있는 신성과 역사와 사람과 말씀을 통하여 전달하는 신의 계시가 하나로 만날 때 진정한 신체험이 있게 된다는 것을 확신으로 가질 때 이미 그것은 그 자신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퀘이커리즘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그의 생애를 퀘이커로서 보낸 것은 이미 그 속에 그러한 속성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길에 접어들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김성수의 말대로 그가 바라는 마지막 종교가 퀘이커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퀘이커로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가 바라는 종교의 형태에 가장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즐겨서 자신을 퀘이커라 표현하기를 좋아했고 세계를 여행할 때는 항상 현지에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과 함께 꼭 그곳의 퀘이커들을 즐겨 만났던 것을 볼 때 그를 한국의 퀘이커라 본 것은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기독교인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커다란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기관에서 한동안 그를 '종교인'이라고 소개하였던 것은 깊이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어느 한 종교에 머물지 않고, 궁극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다양한 종교의 길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냥 '종교인'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교육을 하고, 농사를 짓고, 독재정권과 싸우며, 노동자를 위하여 활동을 전개하고, 민주주의를 위하여 조직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더라도, 그와 같은 그 일이 비록 그가 몸담고 있는 세속의 일이지만, 그 일을 신을 섬기는 예식처럼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둔 것은 깊은 종교인의 행위양식이다. 여기에서 종교행위란 말은 일거수 일투족을 온통 궁극의 존재를 경험하고 역사와 영원, 개인과 역사, 현실과 이상, 사람과 신을 하나로 융합시키려는 진실된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개개인이 구원되고 해방되는 것은 물론 역사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구도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생애를 김성수가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 이 두 도시를 한 그릇 안에 넣어 보려고 애쓴 것으로 규정한 것은 매우 명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민족주의자는 아니었고, 농사를 지은 때도 있었지만 농사꾼이 아니었으며, 교육에 종사한 적도 있지만 직업교사가 아니었다. 정치에 대하여 한 시도 생각을 놓은 적이 없지만 정치가가 아니었고, 생각과 명상을 죽으면서까지 하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는 속세를 떠난 도피자가 아니었다. 불의한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도전하고 저항하였지만 행동주의자는 아니었고, 무엇인가 적극 행동을 통하여 이루어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떠밀려서 어쩔 수 없어 맞이하는 피동자는 아니었다. 한국의 역사를 곰곰이 생각하므로 세계역사의 흐름의 방향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였고, 탄압 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의 권익을 찾고 권리를 찾는 활동을 통하여 탄압자와 탄압의 속성 그리고 그 역사 자체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함석헌은 그냥 계속하여 무엇인가를 찾고 찾은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무엇인가를 계속하여 찾는 행위는 외로움의 표시다. 항변하듯이 '씨 은 외롭지 않다'고 외쳤지만, 그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김성수는 바로 그가 왜 외로워야 했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친구로부터, 스승으로부터, 제자들로부터,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떠밀리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의 그러한 외로움은 한 시도 안락한 상황에 주저앉지 않게 하였고, 땅 위에 살면서도 땅을 믿지 않고, 씨알을 사랑하면서도 씨알에게 온통 자신을 던져 주지 못하는, 슬픔과 외로움을 품은 자였다. 그래서 망국노의 글 장자를 좋아하였고, 세상을 다 살고 떠나는 노자의 글을 좋아하였는지 모른다.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다른 공개강연은 저지 당하면서도 끝까지 이끌어 간 노자와 장자풀이 강좌는 그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유언이면서 시대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구름같이 몰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친구를 찾지 못하였고, 언제나 그의 행동과 말을 멀리에서 기대하지만 자신은 몸을 던져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지 않던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함석헌의 외로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부당한 세력이나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그의 힘은 언제나 씨알을 향하여 새로운 전의를 가다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 가지도 달라진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일반 씨알들의 생각, 행동, 생활양식, 판단 등을 볼 때, 부당한 세력을 거부할 줄 알았던 민중들이 그 세력에 동조하거나 함께 하는 것을 볼 때 그는 한없는 실망과 배신감을 느낀다. 여기에서 씨알을 향한 기대와 애정이 식어지면서, 바라보는 것은 역시 하늘이었다. 그러나 흰구름 떠가는 하늘 저 멀리 비쳐지는 땅의 씨알들의 모습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고 눈감아 버릴 수 없었다. 그러한 함석헌의 사상을 일단 정리한 김성수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4. 책이 말하지 못한 것
우선 김성수의 책에서 한 두 가지 수정하여야 할 사항이 있다. 김교신에 대한 기술 중에서 김교신이 오산학교를 함석헌과 같이 나온 것으로 되어 있고(54쪽),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57쪽), 그는 오산학교와는 관계가 없다. 김교신이 졸업한 학교는 함흥공립농업학교였으며, 일본에서 돌아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일년 정도 교편을 잡았다가 서울에 있는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한다. 이 무렵 '성서조선'은 정상훈을 주간으로 하여 1927년 7월에 창간한다. 이 때는 동인지 형태로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 5월 '성서조선' 16호부터 김교신이 주필이 되어 동인지체제가 끝나고, 김교신체제로 된다. 그리고 1938년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떠나게 된 후 일요 성서공부모임을 창설한 것으로(65쪽) 되어 있으나, 오산의 성서모임은 함석헌이 교편을 잡은 직후부터 시작되었고, 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그 모임에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았울 뿐이다. * 1940년 함석헌이 김두혁의 계우회사건과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그 부친이 사망한다. 김성수는 그 사실을 함석헌이 출옥하여 알게 된다고 하였지만, 김교신의 일기에 의하면 김교신 일행이 문상하기 위하여 함석헌의 용천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예측대로 맏상주는 보이지 않고, '갈 수 없음, 용서 바람, 특히 모친을 위로하라'는 전문 일매 뿐"이라고(김교신전집 6권 489쪽) 기록하여, 감옥에 있는 함석헌에게도 소식이 전달된 것을 말하고 있다. * 1976년 '3.1구국선언'으로 박정희 정권에 도전장을 낸 뒤 1년 가까운 재판과정을 보낸다. 이 때 서남동과 안병무는 감옥에 갇혀 '민중신학'과 '사건의 신학'을 정리하며, 함석헌은 한국의 민주주의원칙을 법정진술을 통하여 정리한다. 박정희 정권은 70년대 초기에 있었던 김지하 필화사건과, 민청학련과 인혁당사건에 이어 커다란 실수를 저질러,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막는' 사태를 불러오고 말았다. 이 때 함석헌과 윤보선은 고령자 대우에 의하여 감옥에 수감되지 않고 재판을 받았으며, 7년형이 확정된 다음 곧바로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감옥생활을 하지 않게 된다. 김성수는 외신보도와 퀘이커지의 보도를 인용하여 함석헌이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144-146쪽) *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8명의 청년을 처형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인혁당 사건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137쪽) 그리고 "씨알의 소리"는 1970년 4월에 창간되어 1호를 내고 폐간된 것이 아니라(138쪽), 5월호 2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이와 같이 단순한 것을 수정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함석헌이 일본에서 공부할 때 갈등,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그리고 기독교노선 중에서 어느 선에 설까를 고민하던 갈등은 그가 일평생을 사는 동안 언제나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기독교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사회주의의 휴머니즘과 무정부주의의 제도와 조직에 반대하는 것을 그의 활동근거로 함은 것은 아닌가?
안병무와 서남동이 발전시킨 민중신학의 맹아를 민중과 한으로 본다면, 그것은 70년대 함석헌의 활동과 말에서 단초를 잡은 것이란 판단은 좀 더 멀리 잡아야 정당한 것이 아닌가? 물론 현실 민중의 한을 해결하기 위하여 투쟁한 것은 70년대이면서, 그 때 감옥에 들어가고 생존투쟁을 하면서 그 신학을 정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이 두 개념, 민중과 한이라는 민중신학의 기초개념은 그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쓰던 1930년대에 이미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의 고난사관은 민중의 한을 중심으로 보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고난을 받는 민족에게 주는 역사의 임무는 종교적 해방의 임무를 완성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발단을 30년대의 역사집필 당시로 잡는 것이 어떨까?
흔히 많은 사람들은 한국 기독교의 숙명론과 재래종교가 추구하였던 기복신앙과 사회문제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을 유교의 유산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158쪽). 동시에 외세에 시달리는 긴 역사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며 정통으로 내려오는 숙명론이 기독교에 접촉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느 면으로는 맞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영향과 세상을 등지는 도교의 일부 경향이 더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현실 권력체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유교의 기본주장이지만, 그러한 현실에 직접 도전하지 않고 멀리 회피하려는 것은 도교와 불교의 또 다른 흐름의 강한 주장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에 살아남기 위한 전략과 전술로서 숙명론을 받아들인 것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인가? 이와 같은 숙명론이나 이른바 '3박자' 신앙이라는 것을 종교의 부정성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적극 자세의 한 편으로 승화시켜 해석할 근거는 없는 것인가? 그것이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와 함께 제대로 융화하는 힘을 가졌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에 개혁성을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독재통치 하에서 교회들이 성장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형식상의 부정성을 극복한 내용상의 긍정국면을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보수성령파 교회의 급성장이 부패권력의 장려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160쪽) 그것을 따르는 일반 신도들의 종교속성과 생활양식에 숨겨 있는 우리 민족의 특성을 살피지 않고는 함석헌이 씨 에게 실망하는 것을 해석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함석헌을 종교다원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가 모든 종교를 인정하고,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정복하여 전도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것, 모든 종교가 궁극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은 한 가지 같은 목적이라고 보는 그의 자세는 매우 다양한 종교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많은 종교들,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가 서로 평행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닥 커다란 흐름 속에 녹아들어 있다. 한국사회는 역사상으로 보나 사회현상으로 볼 때 다원종교사회다. 그렇게 되는 동안에 모든 종교는 서로 수혈하고 영양을 공급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다른 것들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 보면 서로 긴밀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함석헌의 경우 그것을 숨기지 않고 확연하게 들어내었다. 그러므로 그를 종교다원주의자로 규정하기보다는 통합종교를 획책한 사람으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초기의 사상이 말기에 다시 나타나며, 중기의 사상체계가 다른 기회에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엄밀히 분석하여 본다면 그의 사상체계는 30대에 이미 완성단계에 도달할 만큼 성숙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의 사상이 발전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적응양식이 다르게 나타났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을 다루는 것은 연대기를 기술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활동의 주제별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함석헌은 일반 사람, 곧 씨 이 스스로 성숙한 모습으로 평화롭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꾸리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30대 이후에 항상 염두에 두었고, 가끔 실천하여 보려고 하였던 종교와 교육과 농사를 하나로 묶는 생활공동체를 꿈꿨다. 그것이 오산학교에서, 평양은 송산농산학원에서, 해방후 월남하여 씨 농장이나 온양의 구화학교에서 실천하여 보려고 한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어느 것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것이 실패하게 된 것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의 신념이 강하지 못하고, 다만 낭만적 갈망의 대상으로 그것을 보지 않았는가? 바로 거기에 우리가 살 길이 있다는 확신에까지 가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러다 보니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을 때는 그 공동체에 자신을 완전히 투신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결국 자신의 이념이나 사상을 다른 조직력이 있고 참신한 젊은이들이 대신 성취하여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실패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는가? 종교와 교육과 농사를 통합하는 공동체활동을 통하여 그는 무엇을 획책하였는가?
함석헌은 각종 사회운동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독립운동, 민족자존운동, 새종교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반독재운동, 바른 언론운동 따위의 흐름 속에 그는 항상 서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가 주동이 되었던 것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회운동가는 아니었다. 사회운동의 흐름을 함께 타고 가면서 그 운동이 바른 운동이라는 도덕판단을 돕고, 그 운동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고무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자신이 사회운동가로 등장하기에는 너무 일이 많았다. 그는 조직능력이 없었고, 체계 있게 사건과 사물을 분석하는 능력과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자금을 끌어대는 능력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회상이 뚜렷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냥 막연한 그림, 언젠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깨끗한 손이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끌어 갈 것이라는 직관을 통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분명히 어느 형상을 분명히 그리는 것을 금한 기독교의 신관, 노장사상의 영향 그리고 자신의 행동능력을 종합한 사상체계와 행동양식의 결과로 본다. 그가 간디를 좋아했으나, 그의 비폭력 평화운동을 사랑하였을 뿐,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뛰어난 정치력과 조직력 그리고 전략과 전술이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를 보지 못하였다. 정치가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하였기에 끝까지 정치투쟁을 하면서도, 반정치운동을 전개하였을 뿐 정치의 긍정성을 자기의 것으로, 아니 씨알의 것으로 하여야 한다는 면에서 너무 소극반응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씨알의 나라는 성숙된 씨알이 주인으로 행세할 때 건설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씨알을 교육하는 구체행동에 있어서는 너무 힘을 내지 않았다. 물론 월간 잡지 '씨알의 소리'와 대중강연 그리고 소수의 무리를 대상으로 하는 노장사상강좌와 퀘이커모임을 통한 감화로서 씨알의 교육을 획책하였지만, 조직과 체계를 갖추지 못한 점에서 역시 낭만주의에 머물고 말지는 않았는가? 잡지의 독자들과 강연을 듣는 청중들은 맨사람이라 하기에는 너무 지식이 많거나 가진 것이 많았던 사람들이 아닌가? 함석헌과 바닥 씨알은 너무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그러한 행동을 그의 제자들을 엉거주춤한 상태로 머물게 하지 않았는가? 그는 왜 철저하게 제자를 양성하지 않았는가?
왜 함석헌은 첫 번째 사회비판을 종교비판, 특히 기독교비판으로 시작했는가? 혹시 1800년대 초기에 슈티르너와 칼 마르크스 등의 젊은 헤겔주의자들이 전개한 독일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때 기독교비판이나 성서해석비판을 전개한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를 길게 이끌어온 불교나 유교비판이 아니라, 아직 우리 사회에서 큰 흐름이 아니었던 기독교비판을 중요하게 보았는가? 그것과 함께 끊임없이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알"을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과학기술의 발달과 생활의 편리함으로 생각하는 것, 생각을 상실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특히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개개인이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오늘의 인류는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기계가 생각을 주관하는 (machina sapiens) 시대가 되었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때 어떻게 하면 생각하는 인간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함석헌에 의하면 그 길만이 씨알이 씨알됨을 주장할 오직 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것들은 그가 끝까지 잡고 씨름하였던 씨알에 머물게 된다. 씨알이 무엇이며, 왜 씨알이 중요하며, 씨알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런데 씨알의 속성으로 보아 왜 교육하기가 어렵고 조직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힘드는 것인지 살펴야 한다. 김성수의 책에서는 바로 이 부분이 잘 처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연구될 것들은 바로 이러한 면, 즉 씨알과 씨알사상 그리고 이상적인 씨알의 사회상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한 활동이 어떠하여야 하는지가 자세하게 여러 방면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함석헌의 제자들은 그 활동을 전개하기에 적극행동을 진행하지 못하고, 왜 엉거주춤하는 것인가?
함석헌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금년에 함석헌 기념사업회에서 편집한 다음과 같은 책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 선생님"(한길사), "겨레의 스승 함석헌 선생"(한길사), "함석헌 사상을 찾아서"(삼인), "끊이지 않는 강연"(삼인). (2001년 7월 15일 한남대 사회복지학부, 사회학)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