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29, 2007

Unification Unlikely Under Kim Jong-il's Rule.

Korean reunification is unlikely while Pyongyang's current leader Kim Jong-il is still in power, the more likely scenario being South and North Korea engaged in a prolonged period of conferderation-type arrangement, a U.S. historian said Tuesday.

Bruce Cumings also argued that it is unwise to seek agreements with North Kore based on trust, and that any accord with the communist regime should depend on verification.
"I don't think Korean unification will occur while Kim Jong-il is in power," Cumings said at a luncheon speech sponsored by the South Korean embassy, referring to North Korea's 66-year-old top leader.

Instead, a prolonged period of coexistence, culmination in provincial independence and a confederation-like relationship, may be possible 10 to 15 years from now, said Cumings.

South and North Korea are technically still at war, having signed only an armistice at the end of the 1950-1953 Korean War.

Tension lingers as Pyongyang flaunts nuclear capabilities, displayed most recently with its first atomic weapons test in October last year.

A six-nation forum, attended by South and North Koreas, the U.S., China, Russia and Japan, struck a deal last month that commits Pyongyang to shut down and eventually disable its nuclear weapons and programs.

Cumings called the February agreement "no bettrer, and in some ways worse than" the 1994 Geneva Agreed Framework between the U.S. and North Korea. The bilateral pact froze Pyongyang's nuclear activities but was later scrapped following accusations by Washington that the North was hiding a secret weapons program using enriched uranium.

Yet, it is a good agreement, he said, setting principles on ending the Korean War and talking about diplomatic normalizations.

The most unproductive, and "even stupid," U.S. policy has been to divide world affairs strictly in terms of good and evil, Cumings said.

"You may think that North Koreans are evil, but you have to have a policy for what to do about that," he said."

Yonhap - Washington (March 29, 2007)

P.S. Having a confederation-like state form has been considered as an alternative for South Korea to step toward the ultimate unification of two currently separated Koreas. Cumings is pointing out only what has been going around for quite a bit of time, and says not so fresh comments of obviously foreseeable prospects on difficulties of Korea's reunification under Kim. Found his view very disappointing considering he has been well-known as a Korea scholar for some time. ~~;

Wednesday, March 28, 2007

Free Hugs.

Check out the link below.

http://www.youtube.com/watch?v=vL7Jo_1Z3Y8

Just to remind you that I'm available if you need one, seriously! ^^

Monday, March 26, 2007

Whiter Shade of Pale

We skipped the light fandango
turned cartwheels 'cross the floor

I was feeling kinda seasick
but the crowd called out for more

The room was humming harder
as the ceiling flew away

When we called out for another drink
the waiter brought a tray

And so it was that later
as the miller told his tale
that her face, at first just ghostly
turned a whiter shade of pale

She said, "There is no reason
and the truth is plain to see."
But I wandered through my playing cards
and would not let her be
one of sixteen vestal virgins
who were leaving for the coast
and although my eyes were open
they might have just as well've been closed

And so it was that later
as the miller told his tale
that her face, at first just ghostly,
turned a whiter shade of pale.

- Brooker/Reid

Friday, March 23, 2007

Updated news from Korean Ambassadors from Pakistan, Afganistan, and Nigeria

좌담회] [아프간 폭탄테러 한국군 사망]“한국인 안전불감증 심각 …테러 표적 위험성 높다”
[아프간 폭탄테러 한국군 사망]“한국인 안전불감증 심각 …테러 표적 위험성 높다”
- 해당지역 공관장 긴급 좌담회 -
사회 : 정재욱 정치사회부장
김주석 주파키스탄 대사
- ‘밀착 영사서비스’등 대폭확대 ‘교민-대사관 연락망 더 공고히
이기동 주나이지리아 대사
-“우리도 타깃…”우려가 현실로 “현지기업 안전대책 강화해야
강성주 주아프가니스탄 대사
-탈레반 축출 공세에 불안 고조 NGO단체 他종교 포교 자제를
아프가니스탄 폭탄테러로 현지에 파병된 다산부대 윤장호 병장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지면서 전 세계 위험지역에 진출해 있는 기업인, 교민, 여행객 등 우리 국민의 신변안전 문제가 초미의 관심이 되고 있다. 이에 헤럴드경제는 27일 재외공관장회의 참석차 일시 귀국한 강성주(56) 주아프가니스탄 대사를 비롯해 이기동(59) 주나이지리아 대사, 김주석(56) 주파키스탄 대사를 초청, 긴급 좌담회를 가졌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올해 탈레반의 수도 카불 탈환 시도가 예상돼 어느 때보다 치안이 불안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나이지리아의 경우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현지 근로자 납치 사태를 겪었고, 파키스탄은 이란 핵문제로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들 위험지역 현지 치안 실상은 어떤지, 테러 및 납치에 의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이들 지역 대사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사회=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현역군인이 테러로 사망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우선 어떤 조치를 하고 있나.
▶강성주 주아프가니스탄 대사=올해 아프가니스탄 치안이 특히 불안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현지 부대원은 물론 체류 중인 근로자, 비정부기구(NGO) 관계자의 안전을 재점검하는 것이다. 윤 병장의 사후처리 문제와 관련해 현지 주둔 다국적군이 협조를 잘 해주고 있다는 것으로 보고받았지만, 공관 차원에서 주재국 정부와 협조할 일도 있을 것이다. 당초 일정을 앞당겨 귀임할 예정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치안 상황은 어떠한가. 현지 체류 중인 한국인은 얼마나 되며 이들의 신변은 안전한가.
▶강 대사=근로자가 50여명, NGO 종사자 및 가족이 100명이 넘는다. 이들은 부대와는 멀리 떨어진 비교적 안전한 곳에 거주하고 있다. (치안이 워낙 취약해)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체류 중인 우리 국민의 신변 안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정보기관 등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중앙정부는 올해 탈레반 축출에 적극 나서고 있어 치안이 가장 불안 상태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아직 아프가니스탄 중앙정부 권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않고 있어 수사도 안 되고 어떤 사람들이 (테러, 범죄 행위) 했는지 조사가 안 된다. 현지 정부의 치안 및 정보당국에 따르면 현지 주민들은 외국 기업이 아직도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국제금융과 결탁해 들어왔다고 이해하고 있다. 반정부 세력은 정부가 하는 일을 무조건 반대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치안이 불안한데도 NGO 등 한국인 진출이 있는 것으로 안다.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
▶강 대사=앞으로 아프가니스탄 내 한국 NGO 관계자의 수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올해, 특히 7~8월 무렵 치안이 극도로 악화될 것이라는 걱정이 많다. 이 기회를 빌려 그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전후 복구를 도와줄 NGO 진출을 환영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2002년 재건 과정 돌입시 NGO 수는 3000여개까지 치솟았다. 현재는 3분의 1 이하로 정리해 줄었다. 그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NGO가 해선 안 될 사항을 법으로 제정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이다. 첫째, 이슬람교를 세속화시키는 행위. 다시 말해 다른 종교를 전파하는 어떤 행동도 해선 안 된다. 둘째, 절대 영업행위를 해선 안 된다. 일부 사람은 NGO를 설립해 그 단체 이름으로 실질적으로 회사 이익 창출 활동을 한다. 실제 어느 외국 건설회사는 학교, 병원을 지어 자선사업을 하겠다고 해놓고 정작 세금을 포탈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경우가 있다. 주재국 정부에선 그 두 가지 사항을 상당히 주시하고 있어, 의심행동은 적극 피해야 한다. 체류자 안전대책과 관련해 정부에선 나이지리아 사태 이후 외교부 차원에서 현지 조사단을 파견해 안전대책을 종합적으로 세우고 있다. 현지 공관에서도 그와 관련해 주재국과 협의 중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현지 치안이 악화된 상황에선 정부가 취하는 대책에도 한계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오게 될 국민은 공관과 기민한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테러를 비롯해 최근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높아진 때문인지 한국인이 테러의 주요 대상으로 부상한 느낌이다. 현지 진출 기업, 교민 안전 실태는 어떤가.
▶이기동 주나이지리아 대사=(현지 납치, 테러가) 광범위해지면서 우리가 포함됐다. 지난해 6월 대우건설 근로자 피랍 사건을 계기로 ‘우리도 표적이 될 수 있구나’ 경각심이 일었다. 하지만 우리 기업, 근로자가 일차적 표적은 아니다. 작년 한 해만도 그렇고 납치, 테러에 의한 피해는 다른 나라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한국인이 표적이라기보다는 일반적 치안 불안 지역에서 납치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최근에는 중국 필리핀 동구권 등 국적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이뤄진다. 부국이냐, 아니냐 개념이 없다.
▶강 대사=수년 전부터 한국 NGO가 활동해왔는데, 지난 2월 초 한국인을 타깃으로 한 테러 정보가 입수됐다. (편집자주: 이후 외교통상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제한지역으로 설정) 그만큼 테러에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일단 한국인은 현지인과 외모가 비슷해 ‘현지인과 유사한 복장을 하고 움직이면 상당히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러나 다른 외국 거주자에 비해 경호원, 경비회사 지원을 받는 것이 약했다.
-위험지역에서 우리 국민의 안전의식에는 문제 없나.
▶이 대사=안전의식이 결여됐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런 사고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업의 경우 예산을 편성할 때부터 안전 문제를 고려한다. 실제 무장경찰, 해군 경비도 갖추고 있고 이동시에는 무장경관도 동승하는 등 나름대로 안전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 현장이 보트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 있는 데다 무장세력의 화력이나 이동수단이 경비병력을 압도하기 때문에 돌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김주석 주파키스탄 대사=파키스탄 교민들은 현지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조심한다. 상황이 나빠지려면 대사관과 연락을 취한다. 하지만 일부 교민은 ‘여지껏 괜찮았는데’라고 방심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배낭여행객들은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지 않아 직접 연락할 방법이 없다. 파키스탄만 해도 넓고 지역마다 상황이 다르다. 민감한 지역이 있기 때문에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하다 보면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
▶강 대사=아프가니스탄은 세계 각국에서 NGO 수가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안전이 아직은 불안한 지역이고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율법에 위배되는 활동을 하면 위험도가 높아진다. 일단 입국 전에 공관에 안전 관련 자문을 구하거나 방문 또는 전화를 통해 브리핑을 받는 등 활동하면서도 유기적인 연락체계를 유지해야 한다. 대사관 사이트에 어느 지역 위험하다든지 치안 정세를 올려놓도록 했다. 기본적으로 사이트를 한 번 보고 부족할 때는 메일이나 전화로 질문하면 알고 있는 가능한 정보를 제공, 안전에 이상없도록 노력하겠다.
-정부 대책으로는 어떤 게 있을 수 있나.
▶강 대사=현지 주민들과 의사소통하고 의견도 반영하면서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이 좋다. 현지 주민을 많이 채용하고 공공사업도 해주고. 물론 개인 회사가 그런 것까지 커버하는 데는 한계가 있긴 하다. 단기적으로 해결할 대책은 없는 것 같다. 단, 장기적 대책이라면 현지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 예산 지원을 늘려서 정부 차원에서 작은 사업이라도 해준다면 외국기업에 대한 주민들의 오해를 씻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른 나라에 비해 아프가니스탄에는 공적자금이 많이 투입되고 있는데 지방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김 대사=파키스탄의 경우 대사관은 수도에 있지만, 교민들은 다른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주요 대도시인 라오르만 해도 대사관에서 차로 5시간 거리에 있다. 제대로 된 영사 서비스를 하기 어렵다. 전세계적으로 (그런 나라) 여러 곳 있다. 정부에서 올해부터 교민이 있는데 영사 서비스가 어려운 곳에는 영사협력원을 둘 방침이다. 파키스탄은 라오르 한 곳에 두려고 한다.
▶이 대사=테러, 납치 사건이 끊이지 않는 주된 이유는 현지 정부에 대한 무장세력의 불만이다. 따라서 외국 국가에서 하는 얘기는 듣지 않는다. 지금 기업들이 간접적으로 지역에 대해 지원을 많이 해주고 있다. 학교도 지어주고 현지인을 채용하고 있다. 하지만 집단 구성원들의 요구를 다 맞춰주기 어렵다. 주재국 정부에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나이지리아의 경우 유전지대인 니제르 델타가 원래는 농업, 어업 터전이었다. 그런 곳에 유전을 만들어 생활터전을 잃은 국민에 대해 정부 지원이 취약해 불만이 많다. 외국기업들이 학교를 짓거나 우물을 파주는 등 현지 커뮤니티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일과성에 그치고 있다. 근본 대책을 강구하기 어렵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무력을 사용해 무장세력을 소탕하려 해도 늪지대 등 수로가 많이 발달해 있어 소재 파악도 어렵고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전반적인 치안 사정은 좋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납치 사건은 많아진다. 특히 올해에는 대통령 선거, 주지사 선거 등 정치 일정으로 인해 현지 치안이 악화일로에 놓일 것으로 전망된다.
-파키스탄은 최근 이란 핵문제로 불안이 가중되는 모습이다. 위험상황 발발시 대처방안은.
▶김 대사=파키스탄은 국제사회의 대테러전 최전방에서 기여를 하고 있는 나라다. 아프가니스탄에 평화가 오면 파키스탄 치안도 많이 좋아질 것으로 본다. 이런 가운데 이란 문제가 새로운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파키스탄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염려를 많이 하고 있다. 무샤라프 대통령도 중동 순방 하면서 그 문제를 포함해서 이란 핵문제 포함해서 기여해 보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있는데 좋은 성과 있길 바라고 있다. 우리 정부는 상황이 악화될 경우 그에 맞는 대책을 세워 이행할 것이다. 지난 2002년 파키스탄은 9ㆍ11 테러 이후 인도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전쟁 위기까지 대두된 적이 있었다. 당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비상계획을 많이 세워뒀다. 향후 상황이 악화되면 당시 그런 계획들을 토대로 충분한 계획을 세워 이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권로미 기자(romik@heraldm.com)
사진= 안훈 기자(rosedale@heraldm.com)
주아프가니스탄대사, 주파키스탄대사, 주나이지리아대사 출 처: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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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기고문
[좌담회] '오지 공관' 동티모르·네팔·아제르바이잔·코트디부아르 대사 생생 체험담
"하루 7시간 정전 일쑤고 풍토병 주사 직접 놓기도"폭동 구경하다 총맞은 여행객도… 분쟁지 여행땐 안전지침 따라주길오지국과 외교 협력은 미래 위한 투자… 中 적극적 행보처럼 외교 넓혀가야
4개 오지 국가 대사들이 지난달 28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외교활동의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왼쪽부터 류광철 주 아제르바이잔 대사, 남상정 주 네팔 대사, 이지하 주 코트디부아르 대사, 문호준 주 동티모르 대사.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한국일보는 지난달 26~28일 열린 재외공관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동티모르(아시아) 네팔(아시아) 아제르바이잔(동유럽) 코트디부아르(아프리카) 4개국 대사를 초청, 28일 좌담회를 가졌다.
한국 대사관이 개설된 곳은 192개 유엔 회원국 중 100여개국. 그런데 4개국 공관은 외교통상부가 ‘오지(奧地) 공관’으로 분류하는 나라다. 더구나 얼마 전까지 내전 또는 전쟁상태였고 지금도 정정이 불안한 ‘분쟁지역 공관’이기도 하다. 가기 어렵고, 생활하기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한 이곳에서 외교활동과 교민보호에 여념이 없는 대사들로부터 오지 외교의 생생한 체험을 들어 봤다.
_오지인 동시에 분쟁지역이어서 교민ㆍ여행객 보호에 어려움이 많을 텐데.
남상정 주 네팔대사= “지난해 8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봉 인근 계곡에서 우리 배낭족이 실족사해 마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적이 있다. 인적이 드물다 보니 실족 후 수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경찰의 연락을 받은 우리 영사가 시신을 확인하는 데만 3일 걸렸다. 직접 등반해 현장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베이스 캠프가 있는 고지 같은 경우 헬기를 이용하지 못하면 1주일을 걸어가야 한다. 국내 여행객이 히말라야 산악 트래킹을 할 경우 관광가이드의 안내를 받든지 2인1조로 행동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사고 위험이 높고 사고 시 처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 여행객 중에는 민주화운동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수도 카트만두에서 시위가 재미있다고 구경하는 사람도 많다. 위험을 자초하는 행동이다.”
문호준 주 동티모르대사= “지난해 5월 해고군인의 반란으로 시내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는데 사업차 온 우리나라 회사원 중 한 명이 총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나왔다가 유탄에 맞은 적이 있다. 위험한 곳일수록 호기심보다는 신변안전을 중시해야 한다. 남 대사는 2인1조를 말씀하셨는데 나는 3인1조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고를 당하면 한 사람은 사고당사자를 보호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신속히 대사관에 연락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티모르 같은 분쟁지역에 왔을 경우 대사관에 미리 연락을 해 줬으면 좋겠다.”
이지하 주 코트디부아르대사= “2004년 12월 대규모 유혈폭동사태 이후 교민인구가 300명에서 150명으로 줄었다. 폭동 당시 초기단계에는 교민들이 대사관 지시에 잘 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긴장도가 떨어지면서 불감증이 생겼다. 상황이 발생하면 인터넷에도 올리고, 전화도 돌리고 하는데도 교민에게 상황전달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다.”
_대사관 직원이나 교민들이 풍토병과 생활시설 미비로 겪는 어려움도 클 것으로 생각된다.
류광철 주 아제르바이잔대사= “치료문제가 심각하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에서도 의사의 수준이 낮고 제대로 된 의료시설이 없어 병이 나면 무조건 다른 나라로 가야 한다. 과거 공산주의 체제였기 때문에 체육시설 등 가족 여가시설도 거의 없다. 주말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항상 고민이다. 수도인 바쿠는 19세기 말 석유산업이 처음으로 상업화한 도시로 현재도 산업시설이 많다. 더구나 최근의 경제개발 붐으로 전체인구 800만 중에 300만명이 바쿠에 산다. 그러니 공해가 오죽 하겠는가.”
남 대사= “네팔은 11년 간 마오이스트와의 내전으로 인프라가 거의 없다. 공산품과 유류를 100% 인근 인도에 의존한다. 더욱이 지금은 민주화 운동에 따른 혼란으로 불편을 겪는 일이 많다. 카트만두로 진입하는 도로가 시위대에 점거되면 생필품이나 기름이 언제 공급될지 모른다. 이 때는 정전이 하루 6, 7시간씩 계속되기도 한다. 위험한 풍토병은 없지만 의료수준이 낮고 시설도 없어 현지에 봉사단으로 나온 우리 협력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고작이다. 이 때문에 큰 병이 나면 인근 태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는다. 네팔 수상도 우리와 비슷한 고통을 겪어야 할 정도다.”
이 대사= “수도를 옮겨야 했을 만큼 말라리아 황열병 뇌수막염 등 풍토병이 심하다. 말라리아는 대사관 직원이나 교민들이 일상적으로 걸리기 때문에 응급처치용 주사기를 준비해 놓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수도 아비장에 유럽 모 화학회사가 독성이 강한 폐기물을 버리고 가 15명이 죽고 12만명이 호흡기 장애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폐기물 투척장소가 대사관에서 불과 3㎞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당국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를 받지 못했고 유언비어만 돌 뿐 현지 언론도 무감각했다. 상당기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느라 혼이 났다.”
문 대사= “타국의 무관이 뎅기열에 걸려 후송된 지 3일 만에 사망한 일이 있었다. 우리 대사관 직원도 두 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렸지만 다행히 회복됐다. 말라리아나 뎅기열은 면역이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단 감기기가 있으면 지체 없이 확인하고 있다.”
_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오지 국가와 외교관계를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대사= “코트디부아르는 정세와 치안이 불안하지만 서부아프리카의 중심국가다. 코코아 생산량은 세계 1위고, 커피 목재 등 자원도 풍부한 국가다. 앞으로 협력해서 개발할 대상이기 때문에 당장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아 내야 한다. 유엔 등 국제기구 협력차원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다.”
남 대사= “네팔은 사실 광물이나 석유자원도 없는 세계 최빈국이다. 그런데도 국내 모 건설회사는 적자를 감수하면서 사업을 계속한다. 그 이유는 개발 원조를 받아 인프라 구축에 나설 경우 엄청난 건설시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좀 좋아진다 싶어서 뒤늦게 뛰어들면 이미 늦다. 초기 투자가 중요하다. 외교관계 유지는 바로 이런 차원이다.”
류 대사= “석유 가스 등 자원 부국인 이곳에 서방자본이 들어와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여전히 인프라가 낙후돼 있고 산업다변화 필요성도 제기된다. 한국과 이에 대해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노력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나라다.”
문 대사= “동티모르는 천연가스 부국이지만 개발이 안되고 있다. 기업들이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나라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정부가 신생국인 동티모르에 대외원조를 하면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신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대외원조는 미래를 위한 투자다.”
_최근 중국의 적극적인 대 아프리카 외교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우리의 오지외교에서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남 대사= “이른바 대국외교를 펼치는 중국이나 경제강국 외교를 지향하는 일본에 비해 우리 외교관 수가 적다. 일본은 17명, 중국은 30~40명 규모인데 우리는 4, 5명밖에 안 된다. 주재국과의 협력관계나 정보 수집ㆍ제공, 기업서비스, 교민ㆍ여행객 보호 측면에서 경쟁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국민의 기대는 선진국 수준이니 어려움이 크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 할 수 있는 대외원조가 올해 늘어난다고 하지만 아직 우리 경제위상에서 볼 때 창피한 수준이다.”
류 대사= “우리 현실에서 여전히 한반도 주변 4강 외교가 중요하지만 외교관계의 동심원을 점점 넓혀가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해외 공관을 대폭 축소시켰는데 우리 국력에 비해 공관숫자가 지나치게 적다. 중국의 아프리카 공략은 서방이 손대지 않은 미개발지역을 찾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이 대사= “사실 유럽 같은 서방세계는 원조 제공 때 인권 같은 경제외적 문제를 평가한다. 반면 중국은 에너지 확보 등 전략적 측면에서 필요하면 무조건 한다. 그래서 전략적 원조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_아프가니스탄에서 자살폭탄테러로 한국군 병사가 희생됐다. 분쟁지역 대사로서 해외파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류 대사= “국제사회나 유엔 회원국의 일원으로서 일정한 목소리를 내려면 책임도 나눠야 한다. 특히 유엔은 평화유지군(PKO) 예산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큰 전쟁은 없지만 국지전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PKO 파병은 정치적인 대외원조로 생각해야 한다.”
남 대사= “1993년 소말리아에 PKO를 파병할 때 공병부대인 상록수부대를 보내는 업무를 맡았다. 당시 이탈리아 전투부대가 우리 부대 경호를 맡았다. 과연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 군을 제대로 지켜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비 전투부대를 보내더라도 자체 방어부대가 함께 가야 한다. 다국적군과 정치적 성격이 다른 PKO는 임무과정상 희생에 대한 각오를 해야 하고, 이를 국민에게도 알려야 한다.”
문 대사= “한국전쟁 당시 유엔 참전국 군인들의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참전국들은 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우리의 발전상을 자랑스러워 하면서 한국에 진한 유대감을 갖고 있다. 윤장호 병장의 희생이 가슴 아프지만 국익과 대승적 차원에서 판단이 돼야 할 일이다.”

Wednesday, March 21, 2007

On earth as it is in heaven.

My mentor once said that many of developing countries are suffering from side effects/defects en route to the industrialization. The side effects /defects have been already suffered by many advanced societies since their initial burst of industrialization longer than a centry ago. In the land I reside, I feel what he said up close and personal in everyday life. Since the IMF Crisis in 1997, along with other neighboring countries, Korea particularly, has entered into a stage of a brutally competative mode of "survival of the fittest."

First year of my return to Seoul, it was rather invisible to obseve the such harsh reality. Yet, well I guess my luck might come into an end, the workplaces and people I have encountered since then were hardly have any reserves for anything else other than their obsessive struggle to survive in an immense competition they were facing against on every day basis. For example, I have to tell you that averagely at least a couple of employees have been forcefully laid off from work every other months at the firm that I have been working for a year. And now, it is facing a massive downsizing, almost restructing of the firm. Already three workers that I have been acquainted with were told to resign. No doubt it is certainly very depressing to see people leave the workplace against their will, and at the same time makes me wonder that this firm is capable of running the business with an eye to foresee at least a couple of fiscal years ahead. It hires people and lets others go, TOO OFTEN. I understand when running a business, there are ups and downs. However, if one looks for establishing a sound/morally responsible firm, she/he needs to see at least some coming years ahead and lay out the precise/approachable plans, accordingly. People are smiling but there is an eerie sense of heaviness in the air, they stay latea almost every day, God only knows why. If one has a lot of things to do, that certainly is understandable, otherwise, what on earth will staying all day in the office prove? Within the same partitioned section of the office in which I have been working for a year, two out of four are leaving. Isn't it depressing?

From a broader perspective, yet along the same line of thoughts described above, I would like to bring up the issue Korea has been dealt with for some time. Korea's free trade agreements (FTA) with some countries including the US, the EU, Chile, etc., throws some doubts on its effectiveness in terms of improving a quality of lives of individuals. In spite of the desperate efforts of mine to follow the relevant cases, there are still many parts of the FTA negotiations and treaties that I don't fully comprehend. As Korean government and its supporting scholars argue, the pie may be able to increase its size upto some point, but the question is, will it favorably and evenly affect to all??
The strongest and most prominent industry for Korea when it fully opens its market to the world (the US especially) will probably a cutting-edge computerized IT technologies that a few Korean based conglomerates have owned, in particular, the 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dustry. Yes, certainly, the pie for those working for Samsung and its subsidiary firms may well be enlarged, so that they can argue the FTAs are beneficiary. But how on earth would the government explain that increasing numbers of unemployed youths and early-retired still workable mid-aged work force, ever increasing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obviously foreseeable failure in agricultural and poultry industry, etc., which have worsened over the years as Korea has opened its market to some natons? I have to tell you that Korea's FTAs, in particular the one with the US is not quite beneficiary for all. As a matter of fact, it may do so for very few chunks of the society, and it will surely increase the already existing high level of competetiveness in the region.

Here is an important question raising therefrom. I see most of people working in Korea very exhausted and helpless sometime from excessively overloaded amount of work, and almost given up to take care of family lives (no need to remind you of the highest growing rate of divorse, ever decreasing birth rate, prevalent fashion of 'considering marriage as an option', etc. These phenonena may not be new things for most of capitalistic societies, so I wonder why on earth all nations took a role model only (seemingly) from the American capitalism?? Is it really the most ideal system a nation can be run therein? Or, simply the rest of the world doesn't have any other choises because of notoriously bully policies the US has been forcing upon the rest of the world?

The point is, gosh, I need dayoffs that I can spend some valuable time together with my beloveds, and a work area that I don't have to suffocate myself with intoxicating ordors of men smoking cigarettes from stairways of the building. Will the earth ever be like what it is in heaven?

Friday, March 16, 2007

Letter of March 17, 2007

Some of the emails I periodically receive include those from a NGO called "PEACEWAVE," obviously its local branches are located in some of neighboring countries around Korea. A small organization such as this brings me some fresh perspectives on many ongoing issues yet, disregarded by many. So I dearly appreciate they did not forget me and kept updating me with new messages, even though I attended their meeting only once. Today, the message from it contained an introductory ad on a public speech by an immigrant worker with respect to the tragic incident occurred approximately a month ago at the detainment center for illegal immigrated workers in Korea, located in a southern city of Yeo-su. (several detainees were killed by the fire, suspectedly ingnited by an incendiary. The most problmatic thing here was the guard didn't unlock the gate even when the fire became unmanageable and safely evacuated themselves. As a result, victims locked in prison-like cells had to face their death in such a tragic way.) Harsh treatment against illegal immigrants and distreminatory actions toward foreigners in general (particularly toward the 3D workers from South East Asian countries) have been recognized by many from long ago, but only publicly criticized by few NGOs. But the incident brought the sensitive issue to the table and insisted Koreans now is the time to seriously face the issue rather than hide it to save their faces.Being an alien in a few countries over last decade, the issue wasn't something much strange subject to me.

Many thoughts crossed my mind when encountering the news. Although I certainly share the thoughts what the NGOs argue, i.e., the fundamental human rights of illegal immigrants should be secured by all means, I have to admit that more of Koreans take a rather conservative stance when they come to tricky parts of the issue on how to draw a line between protection of illegal workers' rights and protection of the nation's sovereignty. More importantly, the thing really bothers me the most is discrimination between illegal workers from the first world nations and those from the third world nations. Illegally working foreigners do not only come from less developed nations. But those who suffered from abuse from their empolyers, delay of wage payment, being non-recipient of health insurance, etc. are mostly from less-developed countries. A child molester from the US who had been sentenced and served his terms in jail has travelled and taught Engish in many countries in Asia without any legal interferences. Among the countries he set his foot on included Korea, where he completed his contracts with a few private English institutes teaching children under age of 10, and it was only when he went back to the US that people found out he, a sentenced child molester, taught children in Asia. What about a french couple who killed their own two children and left the infants' bodies in the fridge of their own apartment in Seoul before departuring for their home country, France? When being interogated by phone, or other telecommunicating devices after a rather lengthy period of domestic investigation in Korea, they simply denied any charges upon them, and scornfully expressed their intention not to come back to Korea. How simple is that for them? Countless crimes carried out by American soldiers, mentioning about them seems not much worthy any more, because Korea doesn't have any right to prosecute the crime doers under SOFA treaty. Despite all the above-described horrendous precedents, the majority of Koreans are maintaining their stance on the issue, distinctively favoring some over the others, which amazes me greatly.

This morning while serving my morning ritual in the subway commuting to the office, couple of articles on ongoing war in Iraq and Afganistan attracted my attention. It is not that I haven't seen those articles before, but for some reasons, I felt so close to the tragic stories in the region this morning. I felt glad to realize that my heart and mind are still working and longing for the betterment for all, but at the same time, felt incredibly miserable and helpless with a sudden attack of doubts, i.e., if things would be any better with sacrifices from some people?
You see, there are so much of miseries, saddness, fights, killings, hatred and vengeance everywhere. They are so immense, certainly enough to discourage any ordinary minds. I try not to disregard the FACT that there are also much of hope, smile, love, caring, respect and compassion, too, which are not so hard to find if we carefully look around. I think the point is which side we decide to look at, and depending on that, we together will eventually make differences. well... hopefully in a positive way..,,, enough of this..

Monday, March 12, 2007

A prayer from an entangled soul.

Isaiah 41:10 ~ 11

10 So do not fear, for I am with you;
do not be dismayed, for I am your God.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I will uphold you with my righteous right hand.

11 "All who rage against you
will surely be ashamed and disgraced;
those who oppose you
will be as nothing and perish.

- amen.

Thursday, March 08, 2007

Obama's Claim to Selma, Alabama

"Don't tell me that I don't have a claim to Selma, Alabama. Don't tell me that I'm not coming home when I come to Selma, Alabama."

Listen what Obama had to say in Selma, Alabama in marching for memorial day of Bloody Sunday in 1960s.

http://link.brightcove.com/services/link/bcpid416308493/bclid416343960/bctid595233697

Wednesday, March 07, 2007

Into The Soft Soft Night


16"x 20"Mixed Media on Canvas


I lay beneath the sighing stars

And the leafy whispers of the wood

Animal rustlings and watery sounds

Drawing me from a river of dreams

To rest upon the earthy shore

My heart beats so slow
My breath comes so low

Is the world changed in sleep, or me?

I rise and move,

I move into the soft soft night

Tuesday, March 06, 2007

김성수님의 "함석헌 평전"을 읽고

김 조 년
1. 책이 출판된 뜻
저자는 다음과 같이 아주 소박하게 자신의 희망을 표현한다. "태평양 한 가운데에 빗방울 한 방울이 더해지듯이, 이 책이 함석헌의 거대한 사상적 유산을 더하는데 하나의 작은 빗방울이라도 될 수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겠다."(204쪽)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바람을 넘어 이 책은 함석헌 이해에 큰 가닥을 잡는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 분명하다.
책이 집필되고 출판된 시기가 함석헌을 따르고 기억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때였으며, 사회가 바뀌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이 된 지금 함석헌이라는 이름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는 때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우리의 정치상황이 어지럽거나 사회가 불안하여 답답할 때 속시원히 말해줄 사람을 그리워하고, 이러한 때 '선생님이라면 무어라 말씀하셨을까'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그이의 책을 읽은 적도 없고 심지어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수없이 많은 세월이 지났고, 아주 딴 세계에 살았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원효, 최치원, 이율곡, 정다산, 칸트, 헤겔, 흄, 로크, 룻소 따위의 이름을 아주 많이 들어본 적은 있지만, '원효이래 가장 큰 사상가'라고 칭송을 받기도 하는 함석헌이 우리와 같은 시대에 어떻게 호흡하고 살았었는가를 아는 싱싱한 젊은이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가진 함석헌의 제자들이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통하여 함석헌의 사상을 젊은 세대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단법인 "함석헌 선생 기념사업회"를 결성하여 그를 기리고 전파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한 가지 사업이 함석헌이 말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전두환 정권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던 잡지 "씨알의 소리"를 복간하여 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그 잡지가 제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그에 대한 의견이 매우 분분한 상태다. 계속하여 그 잡지를 내야 한다는 의견과 함석헌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잡지 역시 없어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 두 의견 모두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지만, 잡지 "씨 의 소리"는 격월간으로 계속 출간되고 있다. 다만 그 내용의 질과 강도가 만족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함석헌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수단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사상과 활동, 삶과 뜻을 가름하여 본 사람들은 그의 그러한 것들이 꺾이거나 중단되지 않고 계속 퍼져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살고 활동하였던 시기와 지금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시간상으로 본다면 우리의 시대와 그가 살았던 때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대정신을 탄생시키는 시대의 흐름은 너무나 차이가 많다. 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이 심각했던 시대, 남의 힘으로 해방이 이루어져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국가를 이끄는 이념과 운영체계가 달라 나라가 두 동강으로 잘려진 시대, 그래서 반공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우선하던 시대, 그것은 독재정권을 용납시켰고, 혼란한 틈을 타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반공과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인권과 개인의 자유와 생존권을 위한 투쟁과 언론자유가 완전히 보류되어 민주주의가 멀리 보이던 시대였다. 이 때 뜻 있는 사람들은 양극으로 갈라지던 상황이었다. 좀더 도덕을 강조하고 명분과 실제를 일치시키려는 이상주의의 경향과 좀 더 약삭빠르게 현실에 민감한 사람들은 현실론을 내세워 현실정치와 함께 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던 방향으로 갈라지던 시대였다. 사회가 다양한 생각과 행동양식을 허락하지 않고 흑백논리에 버릇되어 있었고,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게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했던 시대다. 적어도 함석헌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까지는 보다 나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위하여 애쓰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인정되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신이 달라졌다. 민족의 고유함을 말하기엔 그것들을 규정하던 각종 경계가 흐려진 글로벌화가 여러 분야에서 확산되어 실현되었고, 매판자본과 민족자본을 논의하기엔 자본의 국적과 물질생활의 현주소가 지나치게 복잡하여 졌으며,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말하기엔 산업사회를 훨씬 지나 정보(화)사회에 접어들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기에는 형식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대로, 이데올로기와 통일을 주장하기에는 상당한 부분까지 그것들이 무의미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억압과 탄압을 무릅쓰고 함석헌이 이루려 하였던 것들이 현실생활에 다가 온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와 가치가 퇴색한 것으로 보이는 때가 되었다. 그가 긴 생애를 사는 동안 아주 깊이 우리의 현실문제에 개입하였기에 그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그가 마치 지금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있는 듯이 느끼는 것은 큰 과오가 아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그를 기억하기 바라는 것은 어떤 면으로는 지나친 욕심인지 모른다. 그가 탄생한 때로부터 한 세게 100년이 지났기 때문만도 아니다. 시대의 흐름이나 사람들의 마음과 관심이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루고자 하였던 사상체계와 삶과 현실을 본다면 그를 그리워하고 다시 되살려 보려는 노력이 결코 헛된 욕심이나 허황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바로 이러한 때, 그가 탄생한지 100년이 되는 금년에 함석헌 기념사업회에서 함석헌을 널리 알리고 되살리기 위한 노력으로 많은 언론 매체와 학술행사, 기념강연이나 전시회 그리고 많은 출판물을 준비한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이에 맞추어 나온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체계를 처음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은 매우 귀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지금 젊은이들이 80년대에 한길사에서 20권으로 출판한 "함석헌 전집"을 읽기에는 시간과 능력과 시대흐름이 맞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간편하고 잘 정리된 책이 매우 필요한 때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이 출판된 것은 그 필자의 노력에 대한 찬사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일이다.
2. 책의 구성과 연구방법
저자 김성수는 함석헌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특별히 선생님의 영향으로 나는 철도 공무원에서 역사가, 골통 보수 기독교인에서 종교적 관용주의자, 복음주의자에서 인도주의자, 교조주의자에서 낭만주의자가 되었다. 내게 역사와 철학의 맛을 알게 해준 분도 선생님이고, 무엇이 인생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가를 깨우쳐 준 분도 선생님이다. 내게 선생님은 진리, 도, 하느님을 보여준 마음의 창문과 같은 존재다. 그가 살아서 그의 가르침과 영감이 내 인생에 어떤 열매를 거두게 했나 보셨으면 하는 염원도 감히 해본다. 그가 남겨 준 따스한 사랑과 들사람얼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항상 나와 함께 하리라 확신한다."(11쪽) 이 말을 상기한다면, 저자는 전혀 함석헌을 객관화하여 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 한 것처럼, 김성수는 함석헌과 가졌던 친밀한 관계를 떠나 '영웅 함석헌'에 대한 글이 아니라, '함석헌 비판'을 하기 위한 자기소외의 아픈 과정을 겪어야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위대한 함석헌' 뒤에 가려 있는 '인간 함석헌'을 보아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업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한국사, 한국기독교사, 세계사와 동아시아사를 연구하였고, 그와 비교될 많은 인물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을 공부하였다. 그런 뒤에 함석헌이 남긴 글들을 몇 번씩 반복하여 읽고, 함석헌과 관계를 맺었던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수행한다. 동시에 함석헌에 관하여 쓴 글들과 활동할 때의 신문과 잡지들을 귀한 연구자료로 삼는다.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하고 정리하기 위하여, 1) 자유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운동가로서의 역할, 2) 혁신적인 그의 종교관, 3) 개인의 영적 완성과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관계, 4) 우주에 산재해 있으면서 개인의 양심과 자연에 내재해 있는 신의 존재를 염두에 두면서 그 시대가 주는 역사적 도전과 대응을 분석한다. 그의 생애를 종교적 확신과 활동을 중심으로 집중하여 분석하고 있다. 그와 같은 것은 원래 이 논문이 한국의 퀘이커 교도로서의 기독교 사상가로 규정된 함석헌의 사상과 활동을 연구 분석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한 논리 전개는 개인의 시간흐름으로 분석한 이 책의 각 장의 제목들이 잘 알려 준다; "사자섬 아이에서 생각하는 기독청년으로", "감방대학에서 노자를 만나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이 남긴 것" 그리고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가 바로 그것들이다. 함석헌의 종교편력이나 신앙체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사회활동을 따라 시간흐름을 밟아가면서 분석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상체계나 행동양식의 체계를 따라서 한 인간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애를 정리하여 기술하는 보통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3. 책이 공헌한 것
함석헌은 일정한 직업이나 전문분야에 종사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한 두 가지 대표할 용어로 그를 규정할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언론인', '종교가' 라고 애매하게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사람들은 또 그를 '종교사상가', '한국의 양심', '싸우는 평화주의자', '한국의 간디' '민권운동가', '무교회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등으로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별칭들은 그가 특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관심을 가지고 한 일의 분야나 행동의 성격을 따라서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하여는 꼭 어느 특정한 틀 속에 그를 규정하여 넣지 않으면 안된다. 무수히 많은 다른 것들을 잘라 버리고, 오직 기술하고자 하는 분야에 해당하는 특성을 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김성수는 '생각하는 기독교인 퀘이커'로 규정하는 듯이 보인다. 그를 일생동안 지배한 것은 기독교임에 틀림이 없다. 또 장로교를 거쳐 무교회에 몸을 담았다가 마지막 30여년은 퀘이커에 자신을 투신하였지만, 어느 한 종파에 꼭 묶어 두어야 한다면 퀘이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가 장로교회 교인으로 있을 때나 무교회에 열중할 때나 역시 그의 기독교신앙의 바탕에는 퀘이커리즘이 맥맥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계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기성 교회의 형식과 조직을 싫어하면서 자기 내면에 있는 신성과 역사와 사람과 말씀을 통하여 전달하는 신의 계시가 하나로 만날 때 진정한 신체험이 있게 된다는 것을 확신으로 가질 때 이미 그것은 그 자신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퀘이커리즘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그의 생애를 퀘이커로서 보낸 것은 이미 그 속에 그러한 속성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길에 접어들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김성수의 말대로 그가 바라는 마지막 종교가 퀘이커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퀘이커로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가 바라는 종교의 형태에 가장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즐겨서 자신을 퀘이커라 표현하기를 좋아했고 세계를 여행할 때는 항상 현지에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과 함께 꼭 그곳의 퀘이커들을 즐겨 만났던 것을 볼 때 그를 한국의 퀘이커라 본 것은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기독교인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커다란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기관에서 한동안 그를 '종교인'이라고 소개하였던 것은 깊이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어느 한 종교에 머물지 않고, 궁극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다양한 종교의 길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냥 '종교인'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교육을 하고, 농사를 짓고, 독재정권과 싸우며, 노동자를 위하여 활동을 전개하고, 민주주의를 위하여 조직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더라도, 그와 같은 그 일이 비록 그가 몸담고 있는 세속의 일이지만, 그 일을 신을 섬기는 예식처럼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둔 것은 깊은 종교인의 행위양식이다. 여기에서 종교행위란 말은 일거수 일투족을 온통 궁극의 존재를 경험하고 역사와 영원, 개인과 역사, 현실과 이상, 사람과 신을 하나로 융합시키려는 진실된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개개인이 구원되고 해방되는 것은 물론 역사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구도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생애를 김성수가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 이 두 도시를 한 그릇 안에 넣어 보려고 애쓴 것으로 규정한 것은 매우 명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민족주의자는 아니었고, 농사를 지은 때도 있었지만 농사꾼이 아니었으며, 교육에 종사한 적도 있지만 직업교사가 아니었다. 정치에 대하여 한 시도 생각을 놓은 적이 없지만 정치가가 아니었고, 생각과 명상을 죽으면서까지 하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는 속세를 떠난 도피자가 아니었다. 불의한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도전하고 저항하였지만 행동주의자는 아니었고, 무엇인가 적극 행동을 통하여 이루어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떠밀려서 어쩔 수 없어 맞이하는 피동자는 아니었다. 한국의 역사를 곰곰이 생각하므로 세계역사의 흐름의 방향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였고, 탄압 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의 권익을 찾고 권리를 찾는 활동을 통하여 탄압자와 탄압의 속성 그리고 그 역사 자체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함석헌은 그냥 계속하여 무엇인가를 찾고 찾은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무엇인가를 계속하여 찾는 행위는 외로움의 표시다. 항변하듯이 '씨 은 외롭지 않다'고 외쳤지만, 그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김성수는 바로 그가 왜 외로워야 했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친구로부터, 스승으로부터, 제자들로부터,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떠밀리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의 그러한 외로움은 한 시도 안락한 상황에 주저앉지 않게 하였고, 땅 위에 살면서도 땅을 믿지 않고, 씨알을 사랑하면서도 씨알에게 온통 자신을 던져 주지 못하는, 슬픔과 외로움을 품은 자였다. 그래서 망국노의 글 장자를 좋아하였고, 세상을 다 살고 떠나는 노자의 글을 좋아하였는지 모른다.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다른 공개강연은 저지 당하면서도 끝까지 이끌어 간 노자와 장자풀이 강좌는 그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유언이면서 시대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구름같이 몰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친구를 찾지 못하였고, 언제나 그의 행동과 말을 멀리에서 기대하지만 자신은 몸을 던져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지 않던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함석헌의 외로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부당한 세력이나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그의 힘은 언제나 씨알을 향하여 새로운 전의를 가다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 가지도 달라진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일반 씨알들의 생각, 행동, 생활양식, 판단 등을 볼 때, 부당한 세력을 거부할 줄 알았던 민중들이 그 세력에 동조하거나 함께 하는 것을 볼 때 그는 한없는 실망과 배신감을 느낀다. 여기에서 씨알을 향한 기대와 애정이 식어지면서, 바라보는 것은 역시 하늘이었다. 그러나 흰구름 떠가는 하늘 저 멀리 비쳐지는 땅의 씨알들의 모습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고 눈감아 버릴 수 없었다. 그러한 함석헌의 사상을 일단 정리한 김성수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4. 책이 말하지 못한 것
우선 김성수의 책에서 한 두 가지 수정하여야 할 사항이 있다. 김교신에 대한 기술 중에서 김교신이 오산학교를 함석헌과 같이 나온 것으로 되어 있고(54쪽),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57쪽), 그는 오산학교와는 관계가 없다. 김교신이 졸업한 학교는 함흥공립농업학교였으며, 일본에서 돌아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일년 정도 교편을 잡았다가 서울에 있는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한다. 이 무렵 '성서조선'은 정상훈을 주간으로 하여 1927년 7월에 창간한다. 이 때는 동인지 형태로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 5월 '성서조선' 16호부터 김교신이 주필이 되어 동인지체제가 끝나고, 김교신체제로 된다. 그리고 1938년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떠나게 된 후 일요 성서공부모임을 창설한 것으로(65쪽) 되어 있으나, 오산의 성서모임은 함석헌이 교편을 잡은 직후부터 시작되었고, 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그 모임에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았울 뿐이다. * 1940년 함석헌이 김두혁의 계우회사건과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그 부친이 사망한다. 김성수는 그 사실을 함석헌이 출옥하여 알게 된다고 하였지만, 김교신의 일기에 의하면 김교신 일행이 문상하기 위하여 함석헌의 용천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예측대로 맏상주는 보이지 않고, '갈 수 없음, 용서 바람, 특히 모친을 위로하라'는 전문 일매 뿐"이라고(김교신전집 6권 489쪽) 기록하여, 감옥에 있는 함석헌에게도 소식이 전달된 것을 말하고 있다. * 1976년 '3.1구국선언'으로 박정희 정권에 도전장을 낸 뒤 1년 가까운 재판과정을 보낸다. 이 때 서남동과 안병무는 감옥에 갇혀 '민중신학'과 '사건의 신학'을 정리하며, 함석헌은 한국의 민주주의원칙을 법정진술을 통하여 정리한다. 박정희 정권은 70년대 초기에 있었던 김지하 필화사건과, 민청학련과 인혁당사건에 이어 커다란 실수를 저질러,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막는' 사태를 불러오고 말았다. 이 때 함석헌과 윤보선은 고령자 대우에 의하여 감옥에 수감되지 않고 재판을 받았으며, 7년형이 확정된 다음 곧바로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감옥생활을 하지 않게 된다. 김성수는 외신보도와 퀘이커지의 보도를 인용하여 함석헌이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144-146쪽) *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8명의 청년을 처형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인혁당 사건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137쪽) 그리고 "씨알의 소리"는 1970년 4월에 창간되어 1호를 내고 폐간된 것이 아니라(138쪽), 5월호 2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이와 같이 단순한 것을 수정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함석헌이 일본에서 공부할 때 갈등,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그리고 기독교노선 중에서 어느 선에 설까를 고민하던 갈등은 그가 일평생을 사는 동안 언제나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기독교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사회주의의 휴머니즘과 무정부주의의 제도와 조직에 반대하는 것을 그의 활동근거로 함은 것은 아닌가?
안병무와 서남동이 발전시킨 민중신학의 맹아를 민중과 한으로 본다면, 그것은 70년대 함석헌의 활동과 말에서 단초를 잡은 것이란 판단은 좀 더 멀리 잡아야 정당한 것이 아닌가? 물론 현실 민중의 한을 해결하기 위하여 투쟁한 것은 70년대이면서, 그 때 감옥에 들어가고 생존투쟁을 하면서 그 신학을 정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이 두 개념, 민중과 한이라는 민중신학의 기초개념은 그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쓰던 1930년대에 이미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의 고난사관은 민중의 한을 중심으로 보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고난을 받는 민족에게 주는 역사의 임무는 종교적 해방의 임무를 완성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발단을 30년대의 역사집필 당시로 잡는 것이 어떨까?
흔히 많은 사람들은 한국 기독교의 숙명론과 재래종교가 추구하였던 기복신앙과 사회문제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을 유교의 유산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158쪽). 동시에 외세에 시달리는 긴 역사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며 정통으로 내려오는 숙명론이 기독교에 접촉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느 면으로는 맞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영향과 세상을 등지는 도교의 일부 경향이 더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현실 권력체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유교의 기본주장이지만, 그러한 현실에 직접 도전하지 않고 멀리 회피하려는 것은 도교와 불교의 또 다른 흐름의 강한 주장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에 살아남기 위한 전략과 전술로서 숙명론을 받아들인 것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인가? 이와 같은 숙명론이나 이른바 '3박자' 신앙이라는 것을 종교의 부정성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적극 자세의 한 편으로 승화시켜 해석할 근거는 없는 것인가? 그것이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와 함께 제대로 융화하는 힘을 가졌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에 개혁성을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독재통치 하에서 교회들이 성장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형식상의 부정성을 극복한 내용상의 긍정국면을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보수성령파 교회의 급성장이 부패권력의 장려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160쪽) 그것을 따르는 일반 신도들의 종교속성과 생활양식에 숨겨 있는 우리 민족의 특성을 살피지 않고는 함석헌이 씨 에게 실망하는 것을 해석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함석헌을 종교다원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가 모든 종교를 인정하고,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정복하여 전도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것, 모든 종교가 궁극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은 한 가지 같은 목적이라고 보는 그의 자세는 매우 다양한 종교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많은 종교들,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가 서로 평행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닥 커다란 흐름 속에 녹아들어 있다. 한국사회는 역사상으로 보나 사회현상으로 볼 때 다원종교사회다. 그렇게 되는 동안에 모든 종교는 서로 수혈하고 영양을 공급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다른 것들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 보면 서로 긴밀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함석헌의 경우 그것을 숨기지 않고 확연하게 들어내었다. 그러므로 그를 종교다원주의자로 규정하기보다는 통합종교를 획책한 사람으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초기의 사상이 말기에 다시 나타나며, 중기의 사상체계가 다른 기회에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엄밀히 분석하여 본다면 그의 사상체계는 30대에 이미 완성단계에 도달할 만큼 성숙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의 사상이 발전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적응양식이 다르게 나타났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을 다루는 것은 연대기를 기술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활동의 주제별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함석헌은 일반 사람, 곧 씨 이 스스로 성숙한 모습으로 평화롭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꾸리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30대 이후에 항상 염두에 두었고, 가끔 실천하여 보려고 하였던 종교와 교육과 농사를 하나로 묶는 생활공동체를 꿈꿨다. 그것이 오산학교에서, 평양은 송산농산학원에서, 해방후 월남하여 씨 농장이나 온양의 구화학교에서 실천하여 보려고 한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어느 것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것이 실패하게 된 것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의 신념이 강하지 못하고, 다만 낭만적 갈망의 대상으로 그것을 보지 않았는가? 바로 거기에 우리가 살 길이 있다는 확신에까지 가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러다 보니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을 때는 그 공동체에 자신을 완전히 투신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결국 자신의 이념이나 사상을 다른 조직력이 있고 참신한 젊은이들이 대신 성취하여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실패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는가? 종교와 교육과 농사를 통합하는 공동체활동을 통하여 그는 무엇을 획책하였는가?
함석헌은 각종 사회운동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독립운동, 민족자존운동, 새종교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반독재운동, 바른 언론운동 따위의 흐름 속에 그는 항상 서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가 주동이 되었던 것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회운동가는 아니었다. 사회운동의 흐름을 함께 타고 가면서 그 운동이 바른 운동이라는 도덕판단을 돕고, 그 운동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고무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자신이 사회운동가로 등장하기에는 너무 일이 많았다. 그는 조직능력이 없었고, 체계 있게 사건과 사물을 분석하는 능력과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자금을 끌어대는 능력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회상이 뚜렷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냥 막연한 그림, 언젠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깨끗한 손이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끌어 갈 것이라는 직관을 통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분명히 어느 형상을 분명히 그리는 것을 금한 기독교의 신관, 노장사상의 영향 그리고 자신의 행동능력을 종합한 사상체계와 행동양식의 결과로 본다. 그가 간디를 좋아했으나, 그의 비폭력 평화운동을 사랑하였을 뿐,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뛰어난 정치력과 조직력 그리고 전략과 전술이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를 보지 못하였다. 정치가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하였기에 끝까지 정치투쟁을 하면서도, 반정치운동을 전개하였을 뿐 정치의 긍정성을 자기의 것으로, 아니 씨알의 것으로 하여야 한다는 면에서 너무 소극반응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씨알의 나라는 성숙된 씨알이 주인으로 행세할 때 건설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씨알을 교육하는 구체행동에 있어서는 너무 힘을 내지 않았다. 물론 월간 잡지 '씨알의 소리'와 대중강연 그리고 소수의 무리를 대상으로 하는 노장사상강좌와 퀘이커모임을 통한 감화로서 씨알의 교육을 획책하였지만, 조직과 체계를 갖추지 못한 점에서 역시 낭만주의에 머물고 말지는 않았는가? 잡지의 독자들과 강연을 듣는 청중들은 맨사람이라 하기에는 너무 지식이 많거나 가진 것이 많았던 사람들이 아닌가? 함석헌과 바닥 씨알은 너무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그러한 행동을 그의 제자들을 엉거주춤한 상태로 머물게 하지 않았는가? 그는 왜 철저하게 제자를 양성하지 않았는가?
왜 함석헌은 첫 번째 사회비판을 종교비판, 특히 기독교비판으로 시작했는가? 혹시 1800년대 초기에 슈티르너와 칼 마르크스 등의 젊은 헤겔주의자들이 전개한 독일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때 기독교비판이나 성서해석비판을 전개한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를 길게 이끌어온 불교나 유교비판이 아니라, 아직 우리 사회에서 큰 흐름이 아니었던 기독교비판을 중요하게 보았는가? 그것과 함께 끊임없이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알"을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과학기술의 발달과 생활의 편리함으로 생각하는 것, 생각을 상실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특히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개개인이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오늘의 인류는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기계가 생각을 주관하는 (machina sapiens) 시대가 되었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때 어떻게 하면 생각하는 인간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함석헌에 의하면 그 길만이 씨알이 씨알됨을 주장할 오직 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것들은 그가 끝까지 잡고 씨름하였던 씨알에 머물게 된다. 씨알이 무엇이며, 왜 씨알이 중요하며, 씨알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런데 씨알의 속성으로 보아 왜 교육하기가 어렵고 조직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힘드는 것인지 살펴야 한다. 김성수의 책에서는 바로 이 부분이 잘 처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연구될 것들은 바로 이러한 면, 즉 씨알과 씨알사상 그리고 이상적인 씨알의 사회상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한 활동이 어떠하여야 하는지가 자세하게 여러 방면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함석헌의 제자들은 그 활동을 전개하기에 적극행동을 진행하지 못하고, 왜 엉거주춤하는 것인가?
함석헌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금년에 함석헌 기념사업회에서 편집한 다음과 같은 책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 선생님"(한길사), "겨레의 스승 함석헌 선생"(한길사), "함석헌 사상을 찾아서"(삼인), "끊이지 않는 강연"(삼인). (2001년 7월 15일 한남대 사회복지학부, 사회학)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Monday, March 05, 2007

Spring , Wedding Invitations & Father
Spring has come in Seoul and I am aware of this because my schedule gets busier every weekend with wedding invitations from those I have acquainted with. Getting invited to weddings as a spinster isn’t always a pleasant thing, I may have to say. Especially if I am not so close to any of bride or groom, receiving invitation cards is almost like getting invoices or bills to pay. Unfortunately, here in Seoul, attending weddings of acquaintances is a customary thing if one still intends to maintain the relationship with those who get married or whose child gets married. The attendance books conveniently decorated with a cover letter “Guest book” are the records of who paid what amount of money, etc., and it is mandatory to fill up before you enter the wedding hall. Usually, a wedding ceremony lasts about half an hour and guests can barely get to see/talk to a bride and a groom during the ceremony. Guests come, leave their names on the book, receive coupons to allow them to enter a cafeteria, and sit there for another half hour or so with people you never have seen before, then leave without even saying goodbye to the newly weds. Seriously, I doubt I would like to marry in this fashion if I can ever have a chance to do so.
Two nights ago, one of two daughters of a Korean Ambassador, who also was one of my bosses two year ago, when I worked for the MOFAT, got married at a wedding hall not so far from my office. My office is located in a rather business district of the city, so I was a little bit surprised to find out there was a wedding hall in one of those gigantic building forests. I knew I probably wouldn’t have a chance to give my best regards to him or any of his family members since I assumed it would be a BIG event and there would be tons of guests from every sector of the society. Most part of my guess was right. Although the wedding took place 6pm of ordinary weekday (considering most of employees work until 6~7pm, it certainly wasn’t the time or the date of anybody’s favorite.), there were still at least more than 600-700 guests were served on the well-organized sets of party tables when I got there around 6:30pm. I had to stand and catch the glimpse of it. Within such a short period of time that I saw the wedding, there were plenty of things came into my mind. They may be rather childish and immature kinds of thoughts. But first thing came into my mind was the almost forgotten nostalgia on a father figure in general. Second was genuine curiosity on becoming a person who has a magnetic power to attract that many people, or may be put this into a different way, becoming a person to be needed by that many people. It certainly was a luxurious and a very big wedding, guests of which included many big shots from governmental/non-governmental sectors of the Korean society. I still had some unfinished loads of work back at the office, then. Just before I got up and about to leave the banquet, to my surprise, the Ambassador and his wife came to my table to pay a visit to guests therein, so that I could at least congratulate them in such a short moment. Then, I came back to my office and completed the work of that day, and left there around 10pm.


Promotion
Couple of days ago, I was quietly called by an attorney who also has been taking care of administrational work of our team and heard that I was promoted. Now, I am one rank up from the bottom, called Daeri (assistant managerial position), and got a raise of approximately USD 4000 yearly. This may be considered very insignificant for many, but I still feel very appreciative for those who consider me as a candidate for the position. Working at the firm for a year, I now can take about 10 days of legally paid dayoffs this year. Although not many employees are taking more than three dayoffs at once, I am dreaming about taking some time off and visiting Vancouver sometime this year.

Mannerism
Do not take me wrong. I do very much enjoy working out at the gym after work with my sister every nightfall, consulting hardships of a day with my mother, filling up my stomach with delicious warm food cooked by mother, and gathering with relatives and friends who care for me, and very appreciate all of them. I love that I now can afford to shop things I want to buy without too much worries on paying next month’s bills, I love to keep my schedules updated with exciting new events, meetings, and I love my self-esteem rather healed, and I become not afraid and confident of my life genuinely. But routines and busy tempo of life in the city gradually drains me, and I feel much less sensitive on ongoing issues around the world, that is, feel rather isolated therefrom. And I begin worrying maybe time does not always remain favorable to me, so unless I take actions now to break this routine, things that I consider as undesirable will only continue and get worse.

Long Walk
It was a holiday celebrating/remembering the March 1st Movement (the famous Korean non-violent independence movement under the Japanese occupation in 1919) yesterday. I took a nephew and wife of one of uncles along with my sister to Gyongbok Palace (the palace where Kings of Joseon Dynasty used to reside), the Blue House (directly interpreted as ‘a house having a blue rooftop; [cheong-wa-dae], the place where Presidents of the Republic of Korea have resided since 1948.), and Insa-dong (an authentic district of the city where ones can find many traditional souvenirs, art crafts, antiques, etc. It took us almost several hours to complete the course, but nobody really complained too much and followed thereof, which is my favorite course of walk in town. (I was grown in that area.) Upon completing the walk, I thought myself how wonderful things would be if our lives could be like that; ended as we planed, long but eventually completed, tiring sometimes but such fulfilling at the end, and troubles here and there but all smiling at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