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27, 2007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실패한 3가지 이유”

I. 진보진영 ‘운동성 복원’ 주장은 대안 아니다
‘참여정부 공과 논쟁’ 속 최장집 교수가 진단한 ‘민주주의의 위기’

학자는 글로써 이야기한다며 말을 아꼈던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가 최근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참여정부 공과 논쟁’에 두 편의 글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최 교수의 발언은 계간 <비평> 2007년 봄호(14호)에 실린 논문 ‘정치적 민주화: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와 후마니타스가 펴낸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에 실린 글 ‘민주주의 실천이 진보 출발점’을 통해 구체화됐다.
‘민주주의 실천이 진보 출발점’에서 최 교수는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이익과 관심을 통합해 내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최근 논쟁의 당사자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를 염두에 둔 듯 “민주주의를 좀더 실질화하고 제도적으로 실천 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부정하면서 ‘다시 운동에 나서자’는 관성화된 주장”을 펴는 것에 의문을 표시했다.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이익을 경시한다면, “운동성의 복원을 그 어떤 급진적 언어로 강조한다 해도” 기성 체제의 헤게모니만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보다는 급진적 민중주의를 통한 운동의 정치를 강조한 조희연 교수의 견해와 뚜렷이 배치되는 내용이다.
최 교수는 이 글에서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도 다시 한번 명확히했다. 그는 “참여적이고 개혁적이며 민족적이고 자주적이며 미국에 대해 큰소리치는 것처럼 자신을 내세우는 민주정부들이 어떻게 해서 빈부격차와 사회 양극화를 확대시키고 저변층을 감당할 수 없는 빈곤에 처하게 하고, 자살-반인륜 범죄-가정 해체로 내몰리도록 방치할 수 있었으며, 과거 권위주의 시절보다 더 ‘재벌 중심-노동 배제를 축으로 하는 성장지상주의’를 추구할 수 있었는가?”라고 물으며, 이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평>에 실은 논문은 이 질문에 대한 최 교수의 대답을 다시 한번 상술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최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 문제의 근원으로 ‘정당체제의 낮은 제도화’를 지목했다. 그는 민주주의 제도 가운데 정당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핵심적인 집단적 행위자라고 못박으면서, 정당을 매개로 하여 갈등의 조정과 타협을 이룰 때만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정당민주주의 또는 정당정치라고 정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이 정당정치의 제도화에 실패했다고 그는 진단했다.
나아가 그는 민주주의의 내용이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민주화란 정치체제의 민주화에서 그쳐선 안 되며, ‘시장경제의 민주적 조율’을 그 실질적 내용으로 갖추어야 하는데 그게 빠졌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집권세력이 성장지상주의에 매몰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닌 불평등 효과를 정치적으로 제어하는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그는 강조했다.
또 최 교수는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이 국가관료기구 통제라는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관료기구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채 개혁목표를 제시하고 그 실제적 정책 결정과 수행을 관료기구에 떠맡김으로써 다수의 이익을 배반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발전하려면, 정당체제의 발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동시에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며, 국가의 행정관료체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II. 최근 노무현 정부는 '민주정부로서 실패했다'고 규정한 고려대 최장집(64) 교수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실패한 원인을 분석했다.
최 교수는 곧 출간될 계간 '비평' 2007년 봄호에 기고한 논문 '정치적 민주화 : 한국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를 통해 민주정부들이 권위주의 정부의 모습을 답습하게 된 원인 3가지를 짚었다.
최 교수는 먼저 정당체제의 제도화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실패한 점을 들었다. 그는 "정당은 정치의 틀 안에서 사회의 주요 갈등과 균열을 대변하고 조직하는 가장 중요한 조직으로 정당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사회통합을 성취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럼 점에서 1948년 분단국가 수립부터 1950년 중반에 이르는 동안 패턴이 형성된 한국 정당체제는 오늘날까지도 제도화 수준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정당의 이름을 말하기보다 당 지도자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편리할 정도인 한국 정당들은 정책 프로그램의 차이를 가지고 조직되기보다 권력 획득을 위한 지도자들의 연결망에 기초해 있다"고 단정했다.
최 교수는 "이처럼 허약한 한국의 정당체제는 한국 정치를 치열한 갈등이 표출되는 이데올로기의 정치로 만들었지만 실제 삶의 변화를 가져 올 정책적 차이는 대단히 미미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두번째 실패원인으로는 취약한 사회적 기반을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정치의 수준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운용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사회ㆍ경제적 수준에서 사회적 기반을 강화해 민주주의가 유지ㆍ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갖는 '불평등 효과'를 정치적으로 완화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소수 엘리트 집단의 이익과 요구만을 반영하는 체제가 될 위험을 항상 안고 있는 셈이다.
최 교수는 "민주화 이후, 특히 외환위기를 겪은 뒤 신자유주의를 향해 내달린 결과 한국사회는 심각한 불평등의 심화를 초래했으며 민주주의를 유지ㆍ발전시키기 위한 조건인 사회적 기반은 크게 위축된 것이 현실"이라고 판단했다.
그 결과 지속적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노동과 복지문제를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제 이 문제가 정치적 경쟁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 교수는 마지막으로 민주정부들이 관료기구를 다루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정부들은 권위주의 시기와(는) 상이한 정책 목표를 천명했지만 구체적인 정책 프로그램과 인적자원을 갖지 못한 까닭에 레토릭(수사)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책결정과 수행은 권위주의 시기에 형성된 관료체계에 의존함으로써 민주정부가 천명한 개혁목표와 실제의 정책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발생했다는 설명이다.
그 결과 정책의 목표와 정치적 레토릭은 개혁적인 반면 실제 정책은 권위주의 정부가 집권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이라는 모순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 교수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민주주의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만약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이 이 체제를 통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평등한 정치적 참여를 본질로 하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실현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김승욱 기자 kind3@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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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진보 논쟁,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 최승국

최근 최장집 교수와 일부 학자들로부터 촉발된 이른바 ‘진보 논쟁’에 노무현 대통령이 가세하면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진보 담론이 없었던 상황을 걱정해 온 필자로서는 우리 사회의 진보에 관한 논의가 다시 살아난 것을 우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학자들의 주장에서나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권의 주장 어디에서도 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진보에 대한 가치는 찾아볼 수 없고 낡은 진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는 이들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정부’라는 점과 조희연 교수가 실패 원인으로 분석한 “보수세력의 저항을 돌파하는 제도장치 바깥의 힘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지적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들 학자들은 한국사회 위기의 더 근본의 문제인 ‘국민들의 삶의 질과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고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만을 추구함으로써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교조적 진보’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유연한 진보’라는 카드를 꺼내 든 것은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발전이나 진보에 대한 생각이 근본에서부터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는 80년대 방식의 진보운동에 대한 생각이 오늘의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생겼다는 얘기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지적한 것처럼 진보가 진보다우려면 미래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데, 대통령의 주장 어디에도 장차 우리 사회가 맞게 될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생명 존중과 생태계 순환에 대한 고려를 찾아볼 수 없다. 그가 든 용산 미군기지 이전과 평택기지 건설과 같은 사례는 유연성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발전이나 진보를 위해서는 경제 가치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발전이고 진보인가? 흔히 사람들은 경제성장과 발전을 동일시한다. 또한 인권문제를 해결하고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것, 노동의 가치를 올바로 평가하는 것 등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나 20세기의 가치에서 본다면 이러한 생각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중심에 놓고 본다면 이는 진보를 구성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인간중심 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속에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존중도 생태계의 순환과 우주의 원리를 지키면서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들어있지 않다. 경제가 아무리 성장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5만달러에 이른다고 한들, 또 인간을 둘러싼 갈등이 완전히 해결되고 분배 정의가 실현된다고 한들, 생명의 가치가 무시되고 그들이 발붙이고 살아야 할 자연환경, 생태계가 이미 사람들의 생존을 허용하지 않는 수준에 도달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사회로 가는 것이 과연 진보인가?
진정한 의미의 사회발전이나 진보를 위해서는 경제 가치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또한 인간의 탐욕을 위해 생태계를 끝없이 파괴하는 사회가 아닌 생명과 생태계의 순환원리가 존중되는 사회로 나갈 때 가능하다.
최승국/녹색연합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