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17, 2015

밴쿠버 데포딜


정국장이 내게 글을 다시 보기를 제안했을 때는 세월호 사건 단원고 희생자 학생 부모님 분이 밴쿠버를 방문한 주말이었다. 밴쿠버는 벗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며 하얗게 봄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곳에서 한국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한다. 한국어를 기회도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 말이 그리워질 때면, 언제나 바쁘신 서울의 부모님을 귀찮게 해드릴 때가 종종 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께 자유를 달라고, 태평양을 건너가면 나아지기는 커녕 여전히 당신의 자유로운 생활을 억압한다고 지경이니 매일 노모에게 국제전화를 해대는 노처녀 딸내미가 많이 한심스럽기도 하실거라 짐작은 하지만, 나로서는 .. 섭섭할 따름이다.  

이런 중에 우연히 참석하게 세월호 희생자 김도언 단원고 학생의 어머님과의 간담회는 여러모로 감회가 깊었다. 이렇게 항상 한국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던 고국에서 모처럼 만에 들려온 소식이니, 희생자들의 아픔에 대한 슬픔 , 고국에서의 소식을 들을 있다는 설렘 반의 마음을 안고 행사 장소에 들어섰다.

간담회는 밴쿠버 다운타운에 위치한 SFU (Simon Fraser University)라는 대학의 Harbour Centre에서 열렸는데, 단원고에서 희생된 학생 명의 부모님 분이 초청연사로 참석하였다. 짧고 바쁜 일정에 이미 토론토에서 강연회와 모임을 마치고 오는 길이니 힘들게 웃는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인터넷을 통해 간간히 고국의 소식을 들을 때가 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에 쫓기노라면 아무래도 소식을 늦게 접하게 되기 마련이기에, 그들의 방문을 통해 서울과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었고 희생자 가족들이 가진 아픔과 동안 특별법 제정이나 특위 구성과 운영과 관련해 그들이 느꼈을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왠지 모를 울적함과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들과, 산적한 해야할 일들에 관한 아득함에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이제 겨울을 벗어나 해가 길어진 탓에 아직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진 않았다.
  
세월호가 침몰한 날은 우연찮게도 서울에 계시는 어머니와 지역 교회의 사모인 사촌 언니가 밴쿠버를 방문하기로 바로 전날이었다. 일년 여를 계획하고 밴쿠버에서 같이 있는 일들을 상상하며 기분이 한껏 들떠있던 바로 ,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방문하기로 사촌 언니에게서 이곳 시간으로 새벽에 카톡이 왔다. 배가 침몰했는데 언니 교회의 신자 명이 탑승하고 있어 여행 계획을 취소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어렵사리 결정되고 추진한 방문이었기에,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싶던 어머니와 언니였는데 출국 하루 전에 그리 문자 하나로 달랑 취소 통보한다는게 처음에는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무슨 배가 어떻게 가라앉았길래..’
툴툴거리며 출근하자 마자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들을 검색해 보았다. 때까지도 나는 태평양이나 대서양, 남극해 가운데도 아니고 배가 침몰해보아야 안에 탑승객들이 구조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한반도를 둘러싼 바다는 내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다이빙을 하면서 줄곧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만끽해오던 터라, 그런 곳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있었다는 사실을 며칠 보도로 다시 접한 나는 경악을 금할 없었다.  마음이 하나 가득 무거워진 하루 동안 팽목항에 다이빙 자원봉사를 떠날 조건이 되는가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사고 이후 며칠 동안은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퇴근 집에서 한인 방송 등을 통해 전해오는 뉴스를 보고 혼자 펑펑 울다 잠이들면, 다음 세월호 소식을 없는 이곳의 사무실 동료들은 부은 눈을 의아해 했다. 같이 힘든 일을 공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외로운 것이라는 것을 다시 절감했다.


Nightfall on Main Mall,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Vancouver, BC, Canada


내가 지난 5 여간 근무해오고 있는 UBC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라는 대학은 학생, 교직원, 교수 등을 포함하면 밴쿠버 캠퍼스에만 7 명이 넘고, 연간 운영 예산이 2조원에 가까운 규모의 대학인데,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뜻에 맞는 한인 친구를 만나기가 이리 어렵다니 언제나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한국어를 구사하고, 문화를 이해하는 직원이나 교직원의 수가 아직 매우 소수라 이들을 찾아내기 조차 어려운 까닭도 있지만, 한미 관계에 비하여 규모에서나 이민자들의 역사에서도 아직 초기 단계인 한카 관계를 반영한 캐나다의 상아탑인 곳에서 조차 한국에 대한 현지인들의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은 까닭도 있겠다.